[숨] 나를 볼 수 없는 거울
[경향신문]
나타샤 패런트의 동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에 나오는 공주 시얼샤는 모든 것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요상한 작은 것”이라고 불렀다. 세상은 보란 듯이, 또는 교묘한 방식으로 공격적이었다. 조금 달랐을 뿐인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너를 이해해주는 곳에 가서 살라는 말을 시얼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얼샤가 살고 싶은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는 토끼가 빠르게 달리고 매가 바쁘게 날아가듯이 자기 자신에게 가는 길을 찾기로 한다. 그리고 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몰랐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새 이야기를 쓰겠다고 결심한다. 그날부터 시얼샤는 세상을 바꾸는 길에 선다.
이번에는 실존 인물 한 사람의 얘기를 해보겠다. 크리스티안 로빈슨은 198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다. 생후 5개월이었던 어느 비오는 날 새벽, 그는 형과 함께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아버지는 아이를 두고 어딘가로 떠나버렸고 어머니는 약물 중독으로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침실이 하나 있는 그 집에서 크리스티안 로빈슨과 그의 형과 두 명의 사촌과 이모와 할머니, 이렇게 여섯 사람이 살았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공간을 찾아야 했다. 종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면서 하루를 보냈다. 할머니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 키웠지만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지금 어디선가 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자꾸만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기분이 되었다. 자신이 그린 그림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차라리 안도감이 들었다.
크리스티안은 그때의 마음을 “잔뜩 흔들어 대는 바람에 곧 터질 것 같은 사이다”처럼 울렁거렸다고 기억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떨어져 있더라도 그와 나란히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여겨진다. 어린 크리스티안에게는 엄마의 장기 투옥 기간이 자신도 벌을 받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지하철을 타고 교도소 면회를 갈 때면 엄마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서 손바닥만 한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사랑과 혼란과 설렘이 쌓이는 시간이었다. 그는 누구와도 ‘다름없는 어린이’였지만 종종 ‘다른 아이’로 취급되었다. 그는 자라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하다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마일로가 상상한 세상>이라는 그림책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며 세상을 그리는 마일로는 크리스티안 로빈슨 본인이다. 이 그림책은 곧 발표될 2022년 케이트 그리너웨이상의 최종후보다.
그림책 속의 마일로는 크리스티안과 꼭 닮았지만 안경을 썼다. 세상을 관찰하는 마일로의 눈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어머니가 곁에 없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다른 사람들과 끊어져 있다는 느낌, 사람들이 나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고 회상한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고정관념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유색인종이라는 사실만으로 크리스티안은 수많은 의혹의 눈길을 받아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남자친구 존을 두고 있다. 독자들에게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삶, 당신의 경험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미쳤거나 부적합하거나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책을 그리고 있다. 자기를 볼 수 없는 세상의 거울에 맞서 그림책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그려넣고 있다. 그는 책 바깥에서 살아가는 시얼샤 공주다.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이종걸 공동대표가 19일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단식 39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와 함께해 온 미류 책임집행위원은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차별할 수 없다. 정의의 회복이 무엇인지 국회가 보여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마일로다.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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