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정상적 老化.. '결코 잊지 않는 두뇌'는 없다

곽아람 기자 2022. 5.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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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대 알츠하이머 센터장 '잊어야 정상적 사고 가능하다' 주장
노화로 인한 망각, 다 치매는 아냐.. 잊는 것보다 '과잉 기억'이 문제
"망각 시스템 제대로 작용 않으면 자폐·PTSD 등 나타날 수도 있어"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

스콧 A. 스몰 지음|하윤숙 옮김|북트리거|284쪽|1만7500원

“내 머리는 강철 덫 같아서 한 번 문 건 놓치지 않았다고요!”

미국 컬럼비아대학 기억장애센터를 찾은 70대 변호사 칼이 단언했다. 칼의 기억력은 비상했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절대 얼굴이나 이름을 잊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 기억력이 저하되고 있었다. 특히 고객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이 그랬다. 최근 만난 지 몇 달 안 되는 신규 고객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칼은 그녀의 이름을 더듬거리고 말았다. “알츠하이머 아닐까요?”

컬럼비아대학 알츠하이머 연구센터장으로 노화와 치매를 전문으로 다루는 의사인 저자는 일단 칼이 자신의 기억력을 ‘강철 덫’에 비유한 것부터 과학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한다. “최상위권에 들 만큼 뛰어나다고 해도 기억은 결코 강철 같은 것이 아니다. 기억은 유연하고, 형태가 바뀌며, 파편화되어 있다.”

저자는 “주변의 거의 모든 이들이 기억력 감퇴를 불평하는데 대다수가 정상적 망각”이라면서 “이는 우리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망각 증상이며 키나 다른 특징처럼 저마다 차이를 보인다”고 말한다. 정규 분포보다 훨씬 키가 큰 사람이 있듯이 타고난 기억력이 정규 분포 최상단에 속하는 사람은 더러 있다. 그렇지만 ‘결코 잊지 않는 두뇌’를 가진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사진 같은 기억’이란 허구이며 수퍼히어로의 능력이다.” 저자는 설령 이런 기억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인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억과 균형을 이룬 망각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알츠하이머와 같은 ‘병적 망각’이 아닌 ‘정상적 망각’에 초점을 맞춘다. 예전 연구에서는 뉴런의 기억 처리 장치가 녹슬어 생기는 알츠하이머의 망각 기제가 정상 노화에도 적용된다 여겼다. 그렇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정상적 망각에 관여하는 완전히 별개의 분자 도구 상자를 알아냈다. 자연이 인간에게 망각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도구 상자를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망각은 기억의 결함일 뿐’이라는 기존 주장이 힘을 잃게 됐다.

저자는 뇌의 망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생기는 ‘과잉 기억’의 폐해를 설명하는 데 책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소설가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주인공을 내세운다. 푸네스는 숲의 나무마다 매달린 모든 잎을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했다. 그렇지만 그는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러 개체의 공통된 특성을 부각시켜 일반화하려면 각 개체의 정보 중 핵심적인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려야 한다. ‘측면의 개’의 세부적 특성과 ‘정면의 개’의 세부 특성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푸네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푸네스의 사례는 자폐증의 메커니즘과도 일치한다. “자폐증과 관련한 유전자 네트워크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심 경향은 유전자들이 한데 공모하여 망각 기능을 높이는 분자 경로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그리고 집단 전체로 볼 때 자폐증을 가진 사람들은 망각 조절 장치가 낮은 수치로 내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뇌가 행동 유연성을 갖기 위한 최적의 방안은 기억과 능동적 망각이 균형을 이루는 것인데, 망각 기능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면 반복적이며 제한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레인맨’ 등 영화를 통해 대중에 알려진 ‘서번트 증후군’의 기계적 암기력도 망각 기능의 감퇴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쟁 등 극도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들이 겪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도 결국 ‘과잉 기억’의 부작용이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감정적 망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조로운 기억에 불행, 공포, 분노, 고통 등의 색깔을 입히는 편도체가 과잉 활성화되면 감정적 망각이 힘들어진다. “’행복은 흰색으로 표현된다’는 격언은 기분 좋은 행복은 멜로드라마처럼 강렬한 색깔을 띠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우리 뇌에도 해당된다.”

결국 ‘기억 강박’에서 벗어나 정상적 노화로서의 망각을 받아들이라는 것이 책의 요지. 기억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해결책 등에 대한 소개는 없지만 그래서 더욱 신뢰가 가는 책이다. 저자는 말한다. “’늙은 개는 새로운 요령을 배우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있지만 우리가 과거의 요령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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