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현의 역린]여의도에 출몰한 전체주의 유령

임지현 서강대 교수 2022. 5.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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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하나의 유령이 여의도 청문회장을 떠돌고 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난 35년의 세월을 민망하게 만드는 이 유령의 정체는 뜻밖이다. 전체주의이다. 산업화 세력을 자처하며 시시때때로 독재자 박정희의 기억정치에 의존하는 국민의힘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화 세력임을 자부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최고위원을 지낸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이 국회 청문회 자리에서 전체주의적 발언을 했다는 게 놀랍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

발언 당사자의 이력을 찾아보니 건실한 정치인인 것 같아 또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코미디 청문회가 몰고온 웃음 폭풍에 김영배 의원의 전체주의적 언동이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그가 속한 더불어민주당은 물론 시민사회의 침묵은 우리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것 같아 답답하다. 그의 문제 발언이 진짜 문제인 것은 그 문제의 심각성을 우리 사회가 별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의 발언을 그대로 따면 이렇다. 그는 ‘검수완박’을 둘러싼 논란에서 사과를 거부하는 한동훈 법무장관 후보자에게 “사과 권고를 의결할 것”을 법사위원장에게 제청했다. “사과를 의결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며 국민의힘 박형수 의원이 일침을 놓았지만, 민주당 소속 법사위 의원들의 훼방 소리에 묻혀 버렸다.

검수완박 법안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임명이라는 정치적 사안의 엄중성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 사안의 정치적 무게가 아무리 무겁다 해도, 사과를 의결하여 법적으로 강제하자는 발언의 역사적 무게보다 더 무거울 수는 없다. 검수완박이라는 실행 법률보다는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이 더 중요한 것이다. 개개인의 도덕적 결단에 따른 사과를 권력이나 법으로 강요한다고 생각하는 발상은 어리석음을 넘어서 매우 위험하다.

정략적인 이해가 담긴 입법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 정신마저 훼손한다면 1987년 민주주의는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민주화 세력이 주도한 문재인 정권의 민주주의에서 느꼈던 위기의식도 이런 이율배반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정략적 목표를 위해 원칙을 훼손하는 도구주의적 정치행태는 ‘국민의 뜻’을 서커스의 기예로 포장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에 가까웠다.

전체주의는 ‘전체 국가’를 향한 파시스트 두목 무솔리니의 꿈에 기원이 있다. 그는 정치적 지배-복종 관계를 넘어 국민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정치의 공적 영역을 넘어서 가정의 사생활에 침투하고 양심과 미적 취향 같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까지 지배하기를 열망했다. 그의 꿈은 전체주의였다.

모든 국민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발적으로 파시즘의 ‘유신’ 프로젝트에 헌신하는 전체주의는 무솔리니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스탈린의 이상이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양심까지 지배하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파시스트적 인간형,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만들겠다는 ‘인간개조’ 혁명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폭력적으로 강제한 ‘사상전향’ 제도 또한 개인의 내밀한 양심까지 지배하겠다는 권력의 의도를 잘 드러낸다.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과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으로 법제화된 일본제국주의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사상 전향자들의 관변단체를 통한 조선인들의 자발적 총동원체제를 욕망했다.

충성스러운 신민들의 내면을 관리하는 ‘교화’ 정책이 먹혀들지 않자 일본 제국은 폭력적인 전향 정책에 호소한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과 사과를 법률로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폭력을 써서라도 개개인의 사상과 양심을 통제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향 제도를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일제의 사상전향 정책은 1945년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일제의 전향자 관제 단체인 보도연맹을 그대로 본뜬 이승만 정권의 국민보도연맹,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부정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리고 5공 당시 학생운동권을 대상으로 한 녹화사업이 그것이다.

대전형무소 등의 정치범 수용소는 사상범들에 대한 고문과 폭력을 동원한 전향 공작으로 악명이 높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강요하는 전향 공작은 양심수의 실존을 부정하고 인간적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비밀경찰 또한 정치범들의 내면까지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의 주류인 운동권 출신 586 의원들 가운데에는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희생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 희생자들이 국회의 의결로 양심의 자유를 통제하겠다고 나선다면, 죽은 독재자가 산 586을 물리친 게 아닌가?

임지현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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