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전 즐긴 개성식 천렵국, 서울서 되살렸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절기는 천구에서 태양이 도는 궤도, 즉 황도 360도를 15도씩 24등분해 정한 날이다.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해 태양의 위치와 계절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게 고안한 일종이 계절력인 것이다. 따라서 음력이 아니라 양력을 따른다. 소만이 되면 모내기 준비가 바쁘고, 보리 이삭은 누렇게 익기 시작한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이때가 끔찍한 춘궁기, 보릿고개다.
붕어·메기·동자개·피라미·누치 들어가
잔풍은 한참 불고 나서 쉬 그치는 바람, 촉고는 코가 촘촘한 그물, 노구는 놋쇠나 구리 솥이다. 은린옥척은 크고 싱싱한 은비늘 물고기를 말한다. 날씨는 덥고 허기진 보릿고개에 개울 물고기 잡아 어죽이나 어탕국수를 끓여 먹으면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었을까. 이게 천렵(川獵)의 묘미다. 강이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는 냇가사냥, 천렵은 수렵·채취 경제 시대에는 중요한 생업 수단이었다. 그러나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부업으로 밀려났다가 점차 놀이로 변했다. 근원이 그러하므로 천렵놀이는 강이나 내가 있으면 어디에서나 현재진행형이다.
1930년대 개성에서 끓인 천렵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개성 사람들이 여름날 보신용으로 즐겨 먹던 천엽국을 끓이는 것이다. 모래사장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핀다. 가장 먼저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살이 무르게 익도록 고기를 삶아 건져내면 다음엔 민물고기들을 그 국물에 넣고 살이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끓인다. 거기에 수제비를 떠 넣은 다음 열무와 깻잎, 미리 건져서 양념해 놓은 세 가지 고기와 참깨를 넣어 된장과 고추장으로 양념해 또 한소끔 끓인다.”
이 음식을 서울에서 되살려 개성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널리 알리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 최 할머니의 외아들인 김노수(65) 로얄하우스홀드㈜ 회장이 2022년 2월 18일(임인년 임인월 임인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개성철렵’이라는 천렵국 전문 음식점을 열었다. ‘천렵’으로 표기해야 맞는 걸 모르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철렵’으로 굳이 쓴 가슴 아린 사연과 야무진 꿈을 그는 말했다.
어머니는 ‘용수산’을 35년이나 이끌었지만, 직접 끓여주는 천렵국을 먹어본 적은 없다. 메뉴를 개발하는 데 4~5년이 걸렸다. 어머니가 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천렵국 기록을 토대로 수없이 실험하면서 맛을 잡아갔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잡냄새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맛은 뭔가 모자랐다. 2%가 부족했던 것이다. 오랜 갑장 친구 둘이 나머지를 채워줬다.
강근골탕·술지게미 넣어 잡냄새 없애
천렵국은 육수에 양념장 풀고, 데친 열무·얼갈이와 미나리 넣고, 결 따라 손으로 찢은 세 가지 고기와 민물새우를 고명으로 올려 냄비 그득하게 채워 나온다. 육수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삶은 국물과 민물고기 뼈가 흐물거리도록 푹 곤 국물을 반 솥씩 준비해 한 솥에 섞어 다시 끓여 만든다. 식탁에서 끓이면서 건지(건더기)를 건져 먹고, 취향에 따라 통밀국수·메밀국수·메밀수제비·쌀밥 등을 추가로 주문해 남은 국물에 끓여 먹는다. 육수는 원하면 계속 부어준다.
민물고기는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사 온다. 붕어·메기·동자개(빠가사리)·피라미·누치가 들어간다. 동자개만 중국산이고, 다른 건 국산이다. 양념장에는 몽고된장(제품 이름)·고춧가루·천일염을 기본으로 마늘·풋고추·생강·민물새우를 갈아서 넣는다. 김 회장은 “인공조미료도 국산과 일본산 두 가지가 조금 들어간다”고 서슴없이 밝혔다.
쏘가리찜과 매운탕도 한다. 쏘가리는 2018년 양식에 성공했지만 아직도 수급이 원활하지는 않아 귀한 음식이다. 8~9월부터는 쏘가리 회도 할 예정이다. 가볍게 곁들일 메뉴로 양지무침, 추하튀김, 제육전유어, 고수무침이 있다. 계절 메뉴로 서리태 콩국수도 한다.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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