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전 즐긴 개성식 천렵국, 서울서 되살렸다

2022. 5. 21.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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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
채소 4가지를 곁들인 쏘가리찜.
한낮이면 벌써 발길이 저절로 그늘을 찾는다. 여름이 오는 신호다. 오늘(21일)은 24절기 중 춘분부터 네 번째인 소만(小滿)이다. 태양이 황경(黃經) 60도를 통과할 때라는 말이다. 한 번쯤 들었음 직한 운율이 떠오른다. “4월이라 맹하(孟夏) 되니 입하, 소만 절기로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학유가 1816년 지은 『농가월령가』의 4월령(음력) 첫 구절이다.

절기는 천구에서 태양이 도는 궤도, 즉 황도 360도를 15도씩 24등분해 정한 날이다. 태음력의 단점을 보완해 태양의 위치와 계절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게 고안한 일종이 계절력인 것이다. 따라서 음력이 아니라 양력을 따른다. 소만이 되면 모내기 준비가 바쁘고, 보리 이삭은 누렇게 익기 시작한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이때가 끔찍한 춘궁기, 보릿고개다.

붕어·메기·동자개·피라미·누치 들어가

개성철렵 김노수 대표. 신인섭 기자
4월령은 이렇게 마무리한다. “앞내에 물이 주니 천렵을 하여 보세/ 해 길고 잔풍(殘風) 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數罟)를 둘러치고 은린옥척(銀鱗玉尺) 후려내어/ 반석에 노구 걸쳐 솟구쳐 끓여내니/팔진미 오후청을 이 맛과 바꿀소냐.”

잔풍은 한참 불고 나서 쉬 그치는 바람, 촉고는 코가 촘촘한 그물, 노구는 놋쇠나 구리 솥이다. 은린옥척은 크고 싱싱한 은비늘 물고기를 말한다. 날씨는 덥고 허기진 보릿고개에 개울 물고기 잡아 어죽이나 어탕국수를 끓여 먹으면 얼마나 시원하고 맛있었을까. 이게 천렵(川獵)의 묘미다. 강이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는 냇가사냥, 천렵은 수렵·채취 경제 시대에는 중요한 생업 수단이었다. 그러나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부업으로 밀려났다가 점차 놀이로 변했다. 근원이 그러하므로 천렵놀이는 강이나 내가 있으면 어디에서나 현재진행형이다.

천렵국 국물은 양쪽 솥에 고기와 민물고기를 달이고 가운데 솥에 합쳐 다시 끓인다. 신인섭 기자
잡은 물고기를 조리하는 방식은 지역과 물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만큼 향토색이 강하다. 특별한 요리법은 없다. 겨우 음식 모양을 갖춘 원초적 수준이지만, 분위기에 취해 즐겁게 먹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학습으로 전수된 음식이 아니라 재료와 장비의 제약이 심한 야외에서 상황에 맞춰서 할 수 있는 만큼만 조리해 먹는 방식이 경험과 견문으로 전승됐기 때문이다. 맛을 낼 재료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요즘은 라면과 분말스프가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다.

1930년대 개성에서 끓인 천렵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개성 사람들이 여름날 보신용으로 즐겨 먹던 천엽국을 끓이는 것이다. 모래사장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불을 지핀다. 가장 먼저 가마솥에 들어가는 것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살이 무르게 익도록 고기를 삶아 건져내면 다음엔 민물고기들을 그 국물에 넣고 살이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끓인다. 거기에 수제비를 떠 넣은 다음 열무와 깻잎, 미리 건져서 양념해 놓은 세 가지 고기와 참깨를 넣어 된장과 고추장으로 양념해 또 한소끔 끓인다.”

쏘가리찜 1차 조리위해 생강·대파를 깔고 찐다. 신인섭 기자
개성음식 전문 ‘용수산(龍水山)’ 창업주 최상옥(1928~2015) 할머니의 자전적 음식 에세이 『사랑만한 음식없고 정성만한 양념없다』의 한 대목이다. 1980년 창업한 ‘용수산’은 한정식을 양식 코스 식으로 전개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도하면서 한때 고급 한식당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려 미국·중국까지 진출할 만큼 성업했다. 그분 기억에는 아마 ‘천렵’이 ‘천엽’으로 입력되었던 듯하다. 이 기록으로 본 천렵국은 지금껏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호화로운 음식이다.

이 음식을 서울에서 되살려 개성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널리 알리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다. 최 할머니의 외아들인 김노수(65) 로얄하우스홀드㈜ 회장이 2022년 2월 18일(임인년 임인월 임인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개성철렵’이라는 천렵국 전문 음식점을 열었다. ‘천렵’으로 표기해야 맞는 걸 모르지 않지만 어려서부터 귀에 익은 ‘철렵’으로 굳이 쓴 가슴 아린 사연과 야무진 꿈을 그는 말했다.

천렵국 육수는 소·돼지·닭고기와 민물고기를 푹 삶아 만든다.
“어머니는 생전에 여름만 되면 천렵국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그때마다 개성식 말투로 ‘조금 끓이면 맛이 나는?’ 하시며 뜻을 접었다. 개성이 고향인 친구들 가운데 식구 많은 집에서는 해 먹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나는 못 해드려서 그게 한으로 남았다. 천렵국을 평양냉면, 함흥냉면, 전주비빔밥처럼 음식 이름 앞에 지명을 붙여 개성 특산음식으로 세상이 알아주게 해 그 한을 풀고 싶다. 이곳을 어머니가 하시던 개성 음식의 방주를 구축하는 원점으로 만드는 게 꿈이다.”

어머니는 ‘용수산’을 35년이나 이끌었지만, 직접 끓여주는 천렵국을 먹어본 적은 없다. 메뉴를 개발하는 데 4~5년이 걸렸다. 어머니가 쓴 두 권의 책에 나오는 천렵국 기록을 토대로 수없이 실험하면서 맛을 잡아갔다. 할 수 있는 걸 다 했지만 잡냄새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맛은 뭔가 모자랐다. 2%가 부족했던 것이다. 오랜 갑장 친구 둘이 나머지를 채워줬다.

천렵국 육수에 쓰는 한방 강근골탕(强筋骨湯).
첫째는 고교 때 단짝인 유병수 소창한의원 원장의 한방 보약 강근골탕(强筋骨湯)이다. 포장한 탕약을 민물고기 반 솥 끓일 때 세 포, 돼지고기·닭고기 삶을 때 한 포를 넣으니 잡내가 사라졌다. 그래도 1%가 부족했다. 충남 아산 ‘李家수불’ 양조장의 이상헌 대표에게 요청해서 받은 술지게미를 곱게 갈아 양념장에 총량의 10%쯤 넣었더니 마지막 1%가 채워졌다. 알코올 함량 19%의 탁주를 빚는 역가 높은 누룩에 어떤 힘이 있을 거라 짐작했는데 그게 적중했다.

강근골탕·술지게미 넣어 잡냄새 없애

천렵국은 육수에 양념장 풀고, 데친 열무·얼갈이와 미나리 넣고, 결 따라 손으로 찢은 세 가지 고기와 민물새우를 고명으로 올려 냄비 그득하게 채워 나온다. 육수는 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삶은 국물과 민물고기 뼈가 흐물거리도록 푹 곤 국물을 반 솥씩 준비해 한 솥에 섞어 다시 끓여 만든다. 식탁에서 끓이면서 건지(건더기)를 건져 먹고, 취향에 따라 통밀국수·메밀국수·메밀수제비·쌀밥 등을 추가로 주문해 남은 국물에 끓여 먹는다. 육수는 원하면 계속 부어준다.

천렵국 건더기를 먼저 먹고 난 뒤 넣는 메밀 수제비.
처음에는 국물 맛과 간이 좀 싱거운 듯하지만 끓일수록 진하고 깊어진다. 특히 곡물 재료를 넣고 끓인 다음 국물 맛의 변화는 요술 같다. 실내에 걸린 캘리그라피 작품들 가운데 ‘잡고기’라는 제목의 글이 천렵국 맛을 보탠다. “이름 없는 물고기 열 마리가/ 쏘가리 한 마리 이겨내는 것은/ 서로 뒤섞여 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민물고기는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사 온다. 붕어·메기·동자개(빠가사리)·피라미·누치가 들어간다. 동자개만 중국산이고, 다른 건 국산이다. 양념장에는 몽고된장(제품 이름)·고춧가루·천일염을 기본으로 마늘·풋고추·생강·민물새우를 갈아서 넣는다. 김 회장은 “인공조미료도 국산과 일본산 두 가지가 조금 들어간다”고 서슴없이 밝혔다.

쏘가리찜과 매운탕도 한다. 쏘가리는 2018년 양식에 성공했지만 아직도 수급이 원활하지는 않아 귀한 음식이다. 8~9월부터는 쏘가리 회도 할 예정이다. 가볍게 곁들일 메뉴로 양지무침, 추하튀김, 제육전유어, 고수무침이 있다. 계절 메뉴로 서리태 콩국수도 한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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