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징궈 사생아 장샤오옌, 60년 만에 생부 성 찾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9〉
장징궈, 장샤오옌 핵심 보직 발탁에 호통
1987년 말, 건강이 악화한 장징궈는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결자해지에 나섰다. 38년간 지속된 계엄령을 해제하고 정당 설립도 묵인했다. 민간인의 대륙에 있는 친인척 방문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장의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정신이 들면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했다. 갓 태어난 쌍둥이 아들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빛바랜 사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듬해 1월 6일, 병간호로 진이 빠진 부인 장팡량(蔣方良·장방량)이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 가기를 싫어하던 장징궈는 난생처음 의사의 권고를 뿌리치지 않았다. 부부가 함께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당일, 장징궈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임종 직전, 50년간 마음 한구석에 숨겨두었던 비밀을 자기도 모르게 토로했다. 1988년 1월 13일 12시55분, 외교부 차장 장샤오옌과 둥야(東亞)대학 총장 장샤오즈의 생모 “야뤄”를 몇 차례 부르고 눈을 감았다. 국상(國喪)기간, 외교부 상무차장 장(章)샤오옌은 공항에서 분주했다. 문상 오는 외빈들 빈소까지 안내하며 날을 샜다. 언론이 쌍둥이 형제의 근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총통직을 승계한 부총통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가 형제의 신분에 관한 성명을 냈다. “장샤오옌과 장샤오즈는 장징궈 선생의 친아들이다.”
2남 장샤오우(蔣孝武·장효무)도 장샤오옌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장(蔣)씨 집안의 자손으로 귀종은 당연하다. 형제자매는 물론, 우리 애들도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모친의 건강이 문제다. 워낙 속이 깊은 분이라 내색은 안 하지만, 장(蔣)씨 성 찾기 위해 귀종을 요구하면 충격이 어떨지 헤아리기 힘들다. 모친은 문맹에 가깝고 중국어도 서투르다. 외부 출입도 안 하고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다. 애들이 눈에 보이면 즐거워하고 마작이 유일한 낙이다. 모친이 생존하는 동안은 귀종 미루기를 건의한다.” 장팡량은 농촌 출신이었다. 보수적이고 자존심이 강했다. 나대는 법이 없다 보니 본인은 몰라도 저절로 권위가 생겼다. 샤오옌도 웃으며 승낙했다.
이복형제들, 오래전에 쌍둥이 존재 알아
장징궈 사망 후, 장씨 집안에 변고가 그치지 않았다. 8년 사이에 장(蔣)씨 3형제가 사망하고 장(章)샤오즈도 세상을 떠났다. 장징궈의 아들 중 남은 사람은 장샤오옌이 유일했다. 외교부장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 역임하며 주목을 받았다. 여배우와의 스캔들도 “장제스의 손자며 장징궈의 아들답다”며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 여름, 60을 눈앞에 둔 장샤오옌이 가족들과 함께 대륙을 방문했다. 광시(廣西)성 구이린(桂林)의 생모 무덤을 참배하고 대성통곡했다. 저장(浙江)성 펑화(奉化)의 장(蔣)씨 사당에서 조상들에게 제를 올렸다. 생부가 태어난 조부 장제스의 옛집에서 마을 노인들에게 부친의 어린 시절 얘기 들으며 한나절을 보냈다. 귀종 1년 후, 다시 구이린을 찾았다. 자신의 성과 모친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혔다. “장태부인아약(章太夫人亞若)”이었던 비문을 “선비장모장태부인지묘(先妣蔣母章太夫人之墓)”로 바꿔버렸다.
지난 일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야뤄도 장(蔣)씨 집안의 가족이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장샤오옌은 달랐다.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문 밖에서 문 안에 들어오기까지 60년이 걸렸다. 들어와 보니 문 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희열을 만끽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