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에 편중된 메타버스, 현실 도피 위험 크다

입력 2022. 5. 21. 00:21 수정 2022. 5. 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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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의 과학 탐미
메타버스(Metaverse)를 무엇이라 정의할까. 1992년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소설 『스노우 크래쉬』에서 저자 닐 스티븐슨은 메타버스를 묘사하면서 고글과 이어폰을 통해서 3D영상을 보고 디지털 스테레오 음향에 취해 자신의 ‘부캐’인 아바타로 활동하는 가상세계라 했다. 이후 그 의미가 상당히 확장되는가 싶더니 급기야 미국의 기술연구단체 ASF(Acceleration Studies Foundation)가 2007년 발표한 ‘메타버스 로드맵’에 따르면, 이전 3D가상세계 개념에 ‘현실’ 개념이 추가되었다. 한마디로 메타버스란 ‘가상과 현실의 적극적 상호작용’ 정도가 될 것이다.

게임·소셜플랫폼서 메타버스 활용

메타버스
메타버스에 대한 이런 정의에도 불구하고 일부 비판론자들은 메타버스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기술 잡지 ‘와이어드’(4월 25일자)에서 에릭 라벤샤프트는 “메타버스가 사이버스페이스로 대체되어도 90퍼센트는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밝혀 “이 용어는 실제로 하나의 특정 유형의 기술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의 광범위한(그리고 종종 투기적인)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혹평했다. 다시 말해, 메타버스는 이전의 사이버스페이스와 그 의미상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버스가 어떤 점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와 차이가 없는 것일까? 즉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메타버스는 가상공간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메타버스가 사이버스페이스인지 아닌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상’과 ‘현실’의 개념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선 VR, 즉 ‘가상현실’이란 용어부터 살펴보자.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용어를 보면 철학에서 흔히 ‘잠재성의’로 번역되는 ‘버추얼(virtual)’과 ‘실재성’을 뜻하는 ‘리얼리티(reality)’가 쓰인다. 그런데 ‘버추얼리티’와 대립된 개념으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또 하나의 용어 ‘액추얼리티(actuality)’를 말한다. 그러니까 ‘버추얼리티’와 ‘액추얼리티’를 구분하고, 이 둘이 함께 ‘리얼리티’에 속한다고 하였다.

우리말로 ‘현실’로 번역되는 두 단어의 혼동을 막기 위해 여기서는 일단 ‘액추얼리티’를 ‘현실’로, ‘리얼리티’를 ‘실재’로 해두자. 그렇다면 세 개의 개념인 가상·현실·실재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가상도 실재이며 현실도 실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실재의 ‘고양이’는 현실에 있는 ‘나비1’ ‘나비2’ ‘나비3’ 등 수많은 현재 고양이들, 또는 과거에 있었거나 미래에 있을 각각의 고양이들, 그리고 가상과 상상 속에 있는 고양이들을 다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실재의 고양이는 현실의 고양이도 되고 가상의 고양이도 된다. 특히 들뢰즈는 현실이나 가상을 포함한 실재에 존재할 때를 ‘subsist’로, 현실에만 존재할 때를 ‘exist’로 표현했다. 말하자면, ‘나비’라는 이름의 개별 고양이는 현실에 존재하고(exist), 가상이나 현실에 있는 고양이라는 ‘종’은 존속하는(subsist) 것이다.

이런 개념은 일찍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도 있었는데 ‘가상적(virtual)’이라 할 때는 ‘아직 현실적(actual)이지는 않지만 실재하는(real) 어떤 것’으로 여겼다. 이 개념으로 보자면 VR안경과 헤드셋을 쓰고 들어가는 세계가 이미 ‘가상실재’다. 그도 그럴 것이 VR안경의 시야각에 따라 미리 마련된 정보가 안경에 비치는 것은 분명 현실의 ‘액추얼리티’가 차단되고 ‘버추얼 리얼리티’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가상(실재)의 측면만을 메타버스가 강화한다면 이전의 사이버스페이스와 전혀 차이가 없게 된다.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 크래쉬』에서도 메타버스는 헤드셋과 같은 기기를 쓰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상공간에 연결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3D가상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2018년에 상영된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는 햅틱수트까지 입고 피부에 자극을 주면서 몸이 현실감을 느끼도록 했지만, 이것 역시 가상공간에 불과하다. 비판론자들의 말마따나 가상에 치우치면 치우칠수록 메타버스는 그 개념이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구식이 될 뿐이다.

어쩌면 현실을 애써 잊기 위해 우리는 가상세계를 더 즐기는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 사회는 코로나와 신냉전, 기후 위기, 특히 경제적 불안과 인간관계의 갈등 등 회피하고 싶은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 탈출구가 보이지 않으면 않을수록 가상세계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더구나 장기간 비대면 활동에 익숙해졌을 뿐만 아니라 각종 주문과 물류 시스템까지 작동하면서 자발적 칩거의 삶도 구태여 마다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이런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각종 우주여행 프로젝트에도 귀가 솔깃한 게 사실이다. 딱 이런 시점에 메타버스가 우리에게 다가왔고, 이미 가상세계에 편중돼 있는데도 그 메타버스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탔다. 하지만 그 메타버스가 제아무리 다양한 최신의 장비들로 무장해도 여전히 가상세계로 기울어졌다면, 현실 도피의 위험이 매우 크다.

일례로 가상게임을 장시간 계속하면 가상의 감각과 현실의 감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어지럼증을 비롯한 극심한 피로감이 몸을 엄습한다. 결국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조이는 통증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가상세계를 빠져나온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처음 한동안은 왜 그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마스킹 효과를 일으키는 ‘감각전이’ 때문이다. 큰 사고로 부상을 입었을 경우 사고 현장에 펼쳐진 시각이나 청각적 자극 때문에 상처 난 곳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마스킹 효과다. 일부 감각에 치우쳐 있다 보니 원래의 감각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다른 감각으로 옮겨져 그것만 의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아바타가 빠른 속도로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울긋불긋한 거리의 네온사인을 보고 엔진의 굉음을 듣게 된다면, 분명 시각과 청각으로는 이동을 느끼지만 몸은 그러지 못한다. 평형감각을 관장하는 귀 속의 반고리관과 전정기관은 아무것도 감지할 수가 없게 된다. 몸의 평형감각이 강렬한 시각과 청각으로 ‘전이’되고 만 것이다. 이렇듯 마스킹 효과로 감각의 부조화가 계속되면 원인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ASF의 2007년 발표에 따르면, 메타버스는 이전에 있었던 3D가상세계 개념에 ‘현실’ 개념이 추가된 것이다. 그 의미는 이미 있었던 가상실재에 ‘액추얼리티’를 추가하자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메타버스는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때의 그 ‘현실’도 비록 영어에서 그것이 ‘리얼리티’로 되었지만 ‘액추얼리티’를 지시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니까 ‘가상실재(Virtual Reality)’가 지금 여기에 ‘액추얼’하게 있지는 않지만 ‘리얼’하게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인 반면, 메타버스는 이 ‘가상실재’에 ‘현실실재(Actual Reality)’를 추가해 가상과 현실이 상호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메타버스는 가상과 현실이 제대로 상호작용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메타버스 중에서 가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메타버스 영역은 현재 로블록스와 포트나이트 등의 게임 영역, 게더하우스를 비롯한 소셜플랫폼 영역, 가상증강(혼합)현실 영역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영역에 따라 ‘가상’과 ‘현실’에 대한 치우침이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을 보자. 증강현실에 대해 우리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아이언맨’에서 손동작만으로 허공에 펼쳐진 디스플레이를 제어하는 장면을 통해 익숙하다. 증강현실에서는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트랙이 늘 동시에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AR은 현실, 즉 액추얼리티에 가상을 겹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증강현실은 1990년 보잉사에 근무하던 토머스 코델이 조종사가 비행기 안에서 머리를 숙여야만 볼 수 있던 운행 정보를 앞면 유리창에서 볼 수 있도록 한 ‘헤드업디스플레이’를 필두로 포켓몬고 등과 같은 게임, 자동차의 내비게이션 정보, 방송국 가상 스튜디오에 등장하는 아바타들, 주문하기 전에 가상으로 옷을 입어볼 수 있는 거울인 스마트글라스 등에 적극 활용되었다. 최근에는 스마트글라스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망막 안에 렌즈를 삽입해 현실을 증강시키려는 노력도 한창이다. 이 기술은 현실을 기반으로 그 위에 가상이 겹쳐지는 성격을 띠었기에 VR보다 더 현실적이라 하겠다.

증강현실, VR보다 현실 더 가까워

아직까지 가상세계에만 머무르는 메타버스의 기형적인 모습 때문에 조금 불안한 감이 있다. 하지만 어디 보자.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발달, 고사양 컴퓨터 및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디지털 기기에 열광하게 되면서 그 시대의 자본은 디지털 조작으로 가치를 만드는 일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좀비 서사가 유행했다. 현실을 도피하며 가상세계에 몰입하면 할수록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피와 내장 등이 적나라한 육체를 애타게 소환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메타버스를 즐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가상공간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먹방’과 같은 ASMR(자율감각 쾌감반응)에 한껏 끌리고 있다. 아마도 메타버스가 극단적 가상화로 치우칠수록 이런 현상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가상성에 빠진 인간의 실재성이 현실성을 향해 손짓하며 육체성을 욕망하고 감각을 호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몸에 좋은 것이 무의식적으로 당기듯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가상과 현실의 상호작용을 무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우리의 ‘레알’은 좀 더 현실과 밀착된 메타버스를 고대하고 있다. ‘먹방’은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지만 정작 나의 혀와 목, 위장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그 공복감에 더 센 자극의 ‘먹방’을 찾곤 한다. 입에서 씹히고 식도를 넘어가 뱃속에서 포만을 느끼게 하는 현실의 식감이 없기 때문이다. 눈과 귀만 호강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숟가락의 얼큰한 국물 맛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나저나 이제 욕탕 안 가득 물을 받아 거품 띄워 놓고 와인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이 밤 사이버공간에 너무 오래 머무른 까닭일 것이다. 

김동훈 인문학자. 서양고전학자·철학자. 서울대와 고려대에서 희랍과 로마문학 및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다. 희랍어와 라틴어 및 고전과 인문학을 가르친다. 인문학의 서사를 담아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퓨라파케’ 대표. 『인공지능과 흙』 『브랜드 인문학』 『키워드 필로소피』 『별별명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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