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서린 천상의 목소리 "신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⑨

문학수 기자 2022. 5. 20.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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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 본명이 니콜라 브로스키(Nicola Broschi, 1705~1782)인 그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아버지에 의해 거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는 1994년에 만들어졌다.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의 등장

16세기의 나폴리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마치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초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분할 통치했다. 하지만 곤살로 데 코르도바(1453~1515)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내면서 나폴리를 한입에 삼켰다. 사실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오랫동안 경쟁했고 우위를 점한 쪽은 대체로 프랑스였다. 하지만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an, 위대한 장군)으로 불리는 코르도바가 전세를 뒤집었다. 1505년 양국이 체결한 리옹 조약에서부터 스페인은 나폴리를 독점 지배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 중반부터 베네치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탈리아 국가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했다. 1700년까지 이런 상태가 이어졌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그렇게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중에서도 나폴리는 200년에 걸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나폴리 사람들은 수탈을 당했다.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를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피폐함으로 서술한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시기에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적 대립이었다. 식민지를 놓고 다툰 전쟁도 있었지만 종교적 갈등으로 촉발된 전쟁이 더 많았다. 이 전쟁들은 내전과 국제전을 망라한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각각 벌어졌던 종교 전쟁, 네덜란드와 스페인 사이에 벌어졌던 50년에 가까운 전쟁, 그리고 17세기 초반에 벌어졌던 독일의 30년전쟁 등이 모두 그렇다. 당연하게도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속담처럼 물가가 폭등해 가난한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16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주식이던 밀의 가격이 3~4배 치솟았는데, 이것은 과거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폭등’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1450년쯤 약 5000만명이던 유럽의 인구는 1600년쯤 약 9000만명에 달했다. 반면에 농업 생산은 정체했다. 밀 가격의 상승은 다른 물가까지 부채질했고 여기에 전쟁과 흉작마저 겹치면서 빈민들 가운데 일부는 배를 곯다가 죽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것이 나폴리에 고아원들이 등장한 배경이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 고아원들을 ‘콘세르바토리오’(Conservatorio)라고 불렀다. 지금은 이 단어가 ‘음악학교’를 뜻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 현재 전해지는 문서로 확인되는 나폴리의 첫번째 고아원은 1537년 문을 연 ‘콘세르바토리오 디 산타 마리아 디 로레토’인데, 설립자는 가난한 고아들을 안쓰러워하던 평범한 구두 장인이었다. 이어서 1600년까지 세 개의 콘세르바토리오가 더 세워졌다. 가난한 고아와 극빈층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기부자와 정부의 지원만으로는 유지하기 어려웠는지, 때로는 ‘필리올리’(figlioli, 작은 아이들)라고 불렸던 아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적선을 구했다. 이것이 훗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돈을 받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교회의 미사와 장례식을 비롯해 거리와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불려갔다. 이렇게 벌어들인 수입이 나폴리의 ‘착한 부자들’이 기부한 돈과 더불어 콘세르바토리오의 재정을 떠받쳤다. 이런 과정을 거쳐 콘세르바토리오는 점점 더 음악학교의 성격을 띠게 됐다. 그곳에서 음악을 배우고 노래를 부르던 필리올리 중에는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불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카스트라토의 빛과 그림자

이탈리아의 화가 바르톨로메오 나자리(Bartolomeo Nazari, 1693~1758)가 1734년에 그린 파리넬리의 초상화. 작곡가 헨델은 그를 “노래하는 기계”라고 불렀다. 그림은 영국 런던의 왕립음악원에 소장돼 있다.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가 막을 올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다. 훗날 ‘파리넬리’(Farinelli)라는 예명으로 불리게 되는 어린 카를로 브로스키(1705~1782)가, 아버지에게 양어깨를 붙잡힌 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당대의 작곡가이자 콘세르바토리오의 교수였던 니콜라 포르포라(1686~1768)에게 오디션을 받는 장면이다. 하지만 소년의 입이 영 떨어지지 않는다. 험악한 표정의 포르포라가 “카를로, 칸타레!(브로스키, 노래해!)”라고 무섭게 명령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포르포라는 “딱 10초를 주겠다”면서, 손가락을 튕겨 시간을 잰다. 10초가 지나도 카를로가 노래하지 않자 “네 목소리를 들려달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른다. 결국 카를로는 밖으로 달아난다. 황급히 쫓아온 아버지에게 “거세당하기 싫어요. 죽기 싫어요!’라고 절규한다.

영화에서는 포르포라를 지나치게 ‘악당’으로 설정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포르포라가 그런 성품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당대에 매우 국제적 음악가였다는 사실이다. 포르포라는 이른바 ‘나폴리 악파’의 핵심으로 손꼽히지만, 활동 반경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들과 오스트리아의 빈, 영국의 런던 등에 걸쳐 있었다. 특히 런던에서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헨델과 흥행 경쟁을 벌였다. 영화 <파리넬리>의 후반부에서도 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경쟁에서 승리한 쪽은 헨델이 아니라 포르포라였다. 물론 그의 오페라에 출연했던 파리넬리의 ‘팬덤’ 덕택이었다. <라루스 음악사전>은 포르포라에 대해 “사람의 목소리의 가능성을 찾아내 그것을 최고로 완성시키는 데 더없이 뛰어난 음악교사”라고 설명한다. 이 탁월한 선생은 나폴리의 여러 콘세르바토리오에서 교수로 재직했는데, 당대 쌍벽이었던 두 명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와 카파렐리(1710~1783, 본명은 Gaetano Majorano)를 모두 가르쳤다. 영화에서도 파리넬리의 아버지가 “마에스트로님! 부디 제 아들을 받아주십시오”라고, 엎드려 빌다시피 간청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어린 카를로를 공포에 떨게 했던 ‘거세’를 이탈리아어로는 ‘카스트라치오네’(castrazione)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아편을 섞은 술을 먹인 다음 거세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흔했던 마취(?) 방법은 소년의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경동맥을 압박해 혼수 상태에 빠지게 해놓고 아이의 정소(고환)를 제거했다. 음경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정소를 완전히 없애 남성성을 박탈하는 것이 거세였다. 대개 일곱 살부터 열두 살 사이에 행해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거세 이후 아이의 음경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끔찍한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목을 졸리다가 혼수에 빠져 그대로 사망하거나 과다 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수술 이후에 감염으로 죽음을 맞기도 했다. 그렇게 카스트라치오네를 당한 아이는 ‘카스트라토’(거세된 자)가 됐다. 아무리 ‘천상의 목소리’ 운운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 끔찍한 짓은 명목상 불법이었지만 나폴리와 로마 등지에 적잖이 퍼져 있었다. 음지에서 꾸준히 거세가 행해졌던 것이다. 카스트라토 중에는 음악가 집안이나 중산층 출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대개 가난한 집안의 아버지가 아들 가운데 하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콘세르바토리오에 입학시켜 유명 가수로 만들어 보겠다는 환상을 품기도 했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가난한 계층에서 굶어죽은 이들까지 생겨나던 상황에서 ‘먹는 입’ 하나를 덜겠다는 심산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의 교황청이 어느 순간부터 이를 용인하면서 그동안 부모들을 옥죄었던 ‘양심의 가책’은 가벼워졌다.

교황 클레멘스 8세(1536~1605)가 1599년에 그렇게 했다. ‘팩트’를 중시하는 프랑스의 음악사학자 파트리크 바르비에르(1956~)의 신뢰할 만한 저서인 <카스트라토의 역사>(일조각)에 따르면, “서류로 확인할 수 있는 한에서, 교황청 성가대에 이탈리아인 카스트라토가 처음 입단한 것은 1599년의 일이었다. (…) 교황 클레멘스 8세는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매력에 사로잡혀 ‘오직 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조건 아래 카스트라토를 공인했다.” 물론 이전에도 바티칸에 카스트라토가 존재했다는 추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문서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카스트라토의 목소리와 발성에 매혹당한 클레멘스 8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프라노 음역을 담당했던 모든 팔세티스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카스트라토들로 채웠다.” 팔세티스트란 팔세토(가성) 창법을 훈련해 노래하던 이들을 일컫는다. 오늘날의 카운터 테너와 흡사하다. 음악적 측면에서 보자면 카스트라토들은 팔세티스트들이 넘볼 수 없는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고음에서도 흔들림이 없었고 음량도 풍부했다. 그들은 여성이 성가대에 서는 것 자체가 금지됐던 ‘암흑기’에 보이 소프라노들과 함께 고음역을 담당했다. ‘이슬람의 음료’로 죄악시했던 커피에 세례를 줘서 유럽의 음료로 바꿔놓았다는 클레멘스 8세는 이렇게 해서 음악사에까지 이름이 오르게 됐다. ‘교황청의 공인’은 당연하게도 카스트라토의 양적 팽창을 부채질했다.

17세기의 스타였던 로레토 비토리(Loreto Vittori, 1600~1670)는 이런 흐름을 타고 등장했다. 그는 1622년 교황청 성가대에 입단해 사망할 때까지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듣기 위해 수많은 청중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신에게 예배하는 것보다 비토리의 ‘기적 같은 노래’를 듣기 위해서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인기는 이탈리아의 수많은 아버지들에게 명예와 돈이라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나폴리와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어린 아들의 육신에 칼을 대는 행위가 점점 노골화했다. 여기에 기름을 붓듯이 또 하나의 일이 벌어졌다. <카스트라토의 역사>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교황 인노센치오 11세(1676~1689 재위)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황령 안에서는 성가대는 물론이고 극장에서도”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다. 결국 교회뿐 아니라 오페라 극장에서도 카스트라토를 향한 수요가 폭발했다. 그렇게 ‘카스트라토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교회와 극장, 귀족의 궁정은 눈에 불을 켜고 카스트라토를 찾아나섰다. 노래를 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가급적 나이도 어려야 했다.

카스트라토의 몸값은 올라갔지만 그들이 언제나 박수만 받았던 것은 아니다. ‘천사’로 칭송받았지만 ‘괴물’로 폄훼되기도 했다. 청중의 환호에 둘러싸여 명성과 돈을 얻은 카스트라토는 극히 일부였으며, 상당수는 시술의 부작용으로 갈라지거나 째지는 목소리를 지닌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어떤 소년들은 카스트라토가 되기도 전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카스트라토로 활동했던 이들도 말년에는 돌봐주는 가족 없이 쓸쓸하게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신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악가이자 작곡가인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 1582~1652). 그가 작곡한 ‘미제레레 메이’(Miserere mei)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금요일 저녁 미사에서 불렸다. 이 곡이 너무도 큰 열광을 불러일으켜 교황이 외부로의 유출을 금했다고 전해진다.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그레고리오 알레그리(1582~1652)는 카스트라토였을까. 이에 대해서는 ‘그렇다’와 ‘아니다’가 공존한다. 명백한 문헌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서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카스트라토의 역사>는 “알레그리는 카스트라토였다”라고 설명하지만 이에 반하는 의견과 주장도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그의 작품 ‘미제레레 메이’(Miserere mei,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됐다”는 사실이다. 알려져 있듯이 이 아름다운 성가의 텍스트는 다윗의 참회다. 시편 51편 1절부터 21절까지를 가사로 삼았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훔쳐보던 권력자 다윗은 욕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밧세바를 범했다. 그것은 ‘통정’이 아니라 겁탈이었으며, 심지어 밧세바의 남편은 다윗에게 충직한 장수 우리야였으니 다윗은 이중의 죄악을 저지른 셈이었다.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하자 우리야를 불러들여 짐짓 성은을 베푸는 것처럼 ‘하룻밤 휴가’를 제안한다. 남편과 아내를 오랜만에 동침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야 뱃속의 생명을 우리야의 자식으로 둔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직한 우리야는 부하들이 전장에서 피 흘리고 있음을 상기하며 이를 거절했고, 다윗은 전략을 바꿔 그를 살해했으니, 참으로 파렴치하고 잔인한 인간이었다.

신(하느님)의 대리인 격인 성자(예언자) 나탄이 나타나자 다윗은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지워주소서”라고 회개한다. 기나긴 참회의 마지막에 “의로운 희생 제물을 바치겠다” “당신의 제단에 수소를 봉헌하겠다”고 서약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다윗은 <사무엘서>의 주인공이고 <시편>의 저자이니, 그의 참회가 성서의 주류적이고 권력적인 서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어쨌든 교황 우르바노 8세의 합창단에서 여성 음역인 콘트랄토(Contralto)를 맡고 있던 알레그리가 이 곡을 작곡한 시기는 1630년대였다. 5성부 합창과 4명의 솔로(소프라노 2, 알토 1, 베이스 1명)가 가사를 주고받으면서 교창(Antiphon)하는 이 노래는 지금 들어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당시에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금요일 저녁 미사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촛불을 하나씩 꺼나가다 “미제레레 메이~”라고 첫 가사가 흘러나오는 순간 마지막 촛불을 껐다. 나머지 가사는 어둠 속에서 신비하게 울려퍼졌다. 그렇게 노래하던 이들 중에 소프라노 파트를 맡은 이들은 당연히 카스트라토였다.

물론 지금은 여성이 노래한다. 때로는 보이 소프라노(특히 영국 성가대)가 노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1 소프라노가 구사하는 ‘하이C’의 고음이 비브라토 없이 깨끗하게 뻗어나가는 장면,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하는 그 장면에서는 카스트라토의 고통과 슬픔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다윗의 장광설에 동의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이 아름다운 성가는 ‘참회의 노래’로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카스트라토를 위한 작품”(<카스트라토의 역사>)이라는 사실에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느 날 거세당한 그가 “신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처럼 들려온다. 구글을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음악이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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