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고통도 잊게 하는 '망각'..인간에게 허락된 축복이었네

김슬기 2022. 5. 2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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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 / 스콧 A 스몰 지음 / 하윤숙 옮김 / 북트리거 펴냄 / 1만7500원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보르헤스 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푸네스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억한다. 축복인 줄 알았던 기억력은 저주다. 1시간 전에 본 장미와 지금 본 장미는 다른 기억으로 축적됐고, 푸네스에게는 '장미'라는 보편 언어는 존재할 수 없어 지식의 체계화가 불가능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일반화를 하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푸네스는 결국 어두운 방에 고립된 채 평생을 보낸다. 인간에게 망각은 축복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책은 기억 전문가가 쓴 망각 이야기다.

스콧 A 스몰은 노화와 치매를 다루는 의사이자 컬럼비아대 정신의학 교수다. 알츠하이머연구센터장을 맡으며 기억을 앗아가는 병과 최전선에서 싸워온 그가 첫 대중교양서를 냈다. 노화와 기억력 감퇴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현대인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다.

망각은 우리의 기억 체계가 지닌 하나의 결함이며 적어도 성가신 골칫거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과학적 견해로 통했다. 뇌과학의 많은 역량은 뇌가 기억을 어떻게 형성하고 저장하고 인출하는지 알아내는 데 집중해왔다. 뇌과학자들에게 망각은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신경생물학, 심리학, 의학, 컴퓨터과학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망각은 정상 과정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능력, 창의력, 정서적 행복과 사회적 건강에 이롭다는 결과가 도출되고 있다.

비범한 기억력을 가진 이들은 분명히 있다. 체스판과 바둑판의 모든 수를 기억하는 프로선수들이 있고, 2시간의 연주를 위한 악보를 모두 암기하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이들은 집중적 훈련으로 우월한 기억력을 개발했다. 저자는 "정식 검사를 해보면 이들 중 누구도 모든 것에 대해 사진 같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단언한다.

치매와 같은 병적 망각과 달리 정상적 망각은 축복이다. 인지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기억과 망각이 이룬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만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을 받아들이도록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고 뒤죽박죽 흩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추상 개념을 추출할 수 있다. 정서적 행복을 위해서도 망각은 필수다. 분노와 신경증적 공포, 통증의 경험도 내려놓을 수 있다. 너무 많이 기억하면 고통의 감옥에 갇힌다.

창의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뜻밖의 연상이 떠오르는 유레카의 순간이 찾아올 수 있도록 망각이 머리를 가볍게 해주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으면 모든 창조적 상상의 나래는 기억의 굴레에 얽매여 있게 된다.

위대한 미국 화가 재스퍼 존스와의 식사에서 저자는 창의력과 망각에 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의 동료였던 윌렘 드 쿠닝이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기억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친구의 오래된 그림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최근 본 작품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몇 년 뒤 쿠닝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는데 투병 시기 그린 유작들을 평가하기 위해 미술사가들이 모였다. 서서히 진행된 망각의 병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완전히 변화했다. 이전에는 풍성할 정도로 촘촘하고 다양한 변화가 담긴 붓질로 인물, 물체, 풍경을 묘사하던 화가는 이후 섬세한 묘사를 대신해 드문드문 리본을 그리고 단순한 색채와 윤곽을 택했다.

미술사가들은 마지막 몇 작품만 제외하고 대다수 작품이 높은 예술적 품질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며 그의 예술적 궤적과도 일관성을 보인다고 결론을 내렸다. 사후인 1997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가 세계적 갈채를 받은 비결이다. 이 대화를 통해 저자는 초기 치매 단계에서도 원칙적으로는 화가의 작품 활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뇌의 연결망에 이상이 생길 때조차 창작은 가능하며 심지어 천재성을 보이기도 한다는 발견도 할 수 있었다.

재스퍼 존스의 대표작 '국기' 또한 꿈 속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새로운 것의 생성이 아니라 기존 요소 간에 생각지 못한 연관성이 불현듯 형성될 때 창작의 불꽃은 일어난다. 즉 잠이 주는 망각의 도움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이 느슨하게 장난스러운 상태로 연결돼 있을 때 가장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공복에 뒤따르는 식욕처럼, 망각으로 머리가 한결 가볍게 회복될 때 기억의 밧줄에서 풀려나 공상과 창의성은 펼쳐진다. 이것이 인지영역의 연금술이다.

알츠하이머병은 해마에서 시작되며 초기 단계에는 새로운 기억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시간이 지나면 뇌의 전반으로 병증이 퍼지며 심각한 인지 결함을 초래한다. 반면 정상적 망각은 기억을 돕는 뉴런 세포의 가지돌기가시가 분해되며 크기가 줄어들 때 일어난다. 자연은 인간에게 기억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분자 도구상자를 주고, 다른 한편으로 망각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분자 도구상자도 줬다. 정상적 망각은 해롭지 않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인지노화는 급속하게 확산할 것이다. 치매와의 전쟁은 예정된 미래다. 인지노화 연구자로서 저자는 인지노화 개선을 위해 약물요법보다 행동이나 식단을 바꾸는 생활요법이 훨씬 적합하다고 조언한다. 자폐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같은 기억력과 관련한 병증에 대해서도 자신의 진료 경험을 통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책을 읽고 나면 건망증에 대해서도 일견 안심하게 된다. 게다가 행복은 잊을 때 온다. 현대인을 위한 안정제 같은 책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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