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열흘, 그리고 1년..맛있는 매실을 위한 기다림

한겨레 2022. 5. 2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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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 매실
5월의 청매와 보드라운 황매
녹진한 단맛에 좋은 성분까지
청, 장아찌 등 두고두고 먹는 맛
5월부터 매실의 계절이 시작된다. 게티이미지뱅크

“이거 빨리 마셔. 손 따는 거보다 이게 더 직방이야!” 소화가 안 된다고 하면 엄마가 입속에 꾸역꾸역 넣어주던 것이 있다. 바로 매실청.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었던 매실청을 꺼내 미지근한 물에 탄다. 달면서 달지 않고 시큼하면서 또 쓴맛도 있고 복잡 미묘한 그 맛. 속이 더부룩해서 죽을 것 같아도 억지로 한컵 들이켜고 나면 그 다양한 맛 덕에 혓바닥을 짭짭거리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이내 소화가 되는 것도 같다. 이쯤 되면 매실청은 약국에서 팔아야 할 것 같은 약이다, 약.

한동안 5월이면 많은 가정에서 매실청 담그기를 김장 행사처럼 했다. 지금은 이 시기가 6월로 밀려났는데, 5월에 수확되는 초록색 매실보다 6월에 수확되는 황매가 영양적으로 더 좋다고 알려지면서 바뀐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매실 가공을 주도했는데 그중 하나가 매실주다. 잘 익은 매실을 발효시켜 맛있는 매실주를 완성하고 술병 속에 매실 원물을 몇알 넣어 존재감을 극대화시킨 매실주. 잘 생각해보면 매실을 발효해서 만든 비싼 발효주 병 안에는 물렁물렁한 매실이 들어 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매실 향 희석주 병 안에는 딱딱한 초록 매실이 들어 있었다. 한동안 색이 예쁘고 더 생명력이 있어 보이는 청매가 대유행을 했지만 잘 익은 황매에 비해 독성분이 많아 가공이 어렵다고 알려지면서 지금은 황매 전성시대가 되어버렸다.

매실은 익은 정도나 가공 방법에 따라 여러 이름을 지닌다. 단단하면서 초록빛이 도는 풋매실인 청매, 다소 부드러운 과육에 달콤새콤한 향이 나면서 노르스름한 황매, 청매를 소금물에 절여 햇빛에 말린 백매(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식 매실 절임인 우메보시와 비슷한 형태), 청매를 쪄서 말린 금매, 청매의 껍질을 벗기고 연기에 그을리거나 태워서 만드는 오매 등이 있다. 모두 예전에는 식품보다 약재로 더 많이 사용됐다.

매실이 약재로 가치를 인정받은 건 풍부한 유기산 때문이다. 요즘은 다양한 종류의 유기산을 가진 식품들이 식후 혈당 조절이나 타액 분비를 유도해 소화를 돕고 신진대사를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해서 인기가 많다. 특히 검은 매실인 오매는 <동의보감> 등 의학 서적에 다양한 효능이 소개되면서 고가의 약재 혹은 비싼 술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매실주. 게티이미지뱅크

매실을 다듬을 땐 물에 잘 씻고 이쑤시개를 이용해 작은 꼭지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한다. 물기를 말리고 매실양만큼의 설탕을 부어 3~4개월 이상 두면 매실청이 된다. 오래 놔둘수록 설탕과 매실의 성분들이 배어나고 섞이면서 좋은 향과 맛을 낸다. 하지만 당 성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니 조심하자. 10년이 지나도 단물은 단물이다.

설탕에 재어둔 매실에 소주나 보드카를 부어서 1년을 놔두면 매실주가 된다. 원래는 매실만 온전히 발효해야 진짜 매실주지만, 매실은 당분이 적은 과일이라 자체적으로 발효하기 굉장히 어렵다. 간편하게 담금주 형태로 소주를 부어 만들 수도 있는데, 매실의 성분이 녹아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 빨리 만든다고 매실에 설탕 버무려 두었다가 소주 붓고 바로 마시는데 이렇게 하면 그저 매실 향 설탕소주가 된다. 이건 매실주와는 거리가 멀다.

꼭지를 딴 매실의 엉덩이 부분을 누르면 매실이 쪼개지는데 속의 씨를 제거하고 3~4등분한 뒤 고추장에 넣어 3~4개월 두면 매실 고추장 장아찌가 된다. 이렇게 몇달 숙성한 뒤 매실 과육을 꺼내 참기름만 살짝 두르고 먹어도 맛있다. 매실을 박아두었던 고추장은 자연스럽게 매실의 유기산을 품은 매실 고추장이 된다.

필자는 해마다 6월이면 꿀을 넣은 매실 장아찌를 만든다. 황매의 꼭지를 따고 과육만 잘라낸 뒤 소금과 설탕을 반씩 섞어 매실에 버무려 실온에서 열흘 둔다. 이후 매실 살을 건져내서 꿀에 담가 1년을 냉장고에 두면 새콤달콤 맛있는 매실 반찬이 된다. 천연 벌꿀이 너무 비싸서 부담되면 사양 벌꿀을 사용해도 좋다. 꿀은 꼭 매실의 양보다 많이 넣어서 매실이 잠기도록 하고, 냉장고에 오래 둘수록 맛있다. 물이 계속해서 많이 생기는데 매실을 담가두고 먹다가 물만 남으면 그 물은 먹지 않고 버린다. 1년의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매실 자체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알다시피 매실은 좋은 성분이 많은 과실이지만 사과처럼 바로 먹을 수 있는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다. 올해 준비해서 내년에 행복해지는 매실. 좋은 것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천천히 느리게 가는 매실의 시간을 기다려보자.

홍신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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