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테이프로 전해진 한국 대중문화, 20년 뒤 이곳 주류로 자리 잡아[다른 삶]

성우제 입력 2022. 5. 20. 16:07 수정 2022. 5. 20.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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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제의 '경계인'

[경향신문]

캐나다 넷플릭스에 올라 있는 한국 드라마들. 한국 드라마를 외국에서 이렇게 쉽고 다양하게 시청할 수 있다.

2002년 5월 내가 캐나다로 살러간다는 말을 전해들은 어느 지인이 연락을 해왔다. “토론토에 동생이 살고 있는데, 만나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내 손에 무엇을 들려주었다. 한국 영화가 담긴 비디오테이프 3개였다. 동생이 늘 바쁘다고 하니, 물건을 전한다는 핑계를 대며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토론토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터라 나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토론토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더니 지인의 동생 부부가 우리 동네까지 차를 몰고 왔다. 나는 궁금한 것들을 물었고 그이도 내게 질문을 했다. “서울에서 기자로 일했다고 들었다. 여기서는 어떻게 살 계획을 가지고 있나?”

나는 막연하게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이야기했다. “일단 다운타운에 있는 커피숍이나 샌드위치숍에 가서 헬퍼(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최저 시급 ‘알바’)로 일하며 분위기부터 익히고 싶다.” 그이는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이민생활을 그렇게 시작한다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금방 자리 잡을 수 있다.”

나에게는 큰 힘이 되는 말이었다. 토론토의 유명 쇼핑몰에서 자기 가게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 당연히 그랬다. “자리 잡을 수 있겠다”는 그이의 말은 4년 후에 실현되었다. 그의 말이 맞아떨어진 것이 퍽 신기했다. 그 이후 한국 영화나 드라마 비디오테이프가 눈에 띌 때마다 반가웠다. 다름 아닌 비디오테이프를 전하는 심부름 덕분에 나로서는 초기 이민자로서의 불안감을 다소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음악
한류 타고 캐나다로 스며들어
K팝은 이곳 젊은이들 매료
한국 말 잊어버린 둘째 애가
아이돌 가사 적으며 한글 익혀
공연 보러 왕복 2000㎞ 운전도
녹화로 보던 한국 드라마도
안방서 실시간으로 골라서 봐

비디오테이프를 접하면 반갑기는 했어도, 선뜻 보게 되지는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 식품점에 가면 한국 방송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수 있었고, DVD가 나온 데 이어 한국 드라마를 늦게나마 방영하는 채널도 생겨났으나 일부러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이민자라면 누구나 그랬다. 한국 방송을 보면 볼수록 캐나다 적응이 그만큼 늦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 몇년 동안은 오로지 캐나다 방송만 봤다. 스포츠 채널 외에는 한결같이 밋밋하고 재미가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둑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점은 한국 식품점에서 비디오테이프가 사라질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국 드라마를 안 보려 한다 해도 그러기가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내 가게를 열고 운영하면서 초기 이민자 처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도 했거니와, 내가 일부러 찾지 않아도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나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즈음 한국 드라마가 재미있다며 적극 권유한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외국인이 한국 사람에게 한국 드라마를 소개한 셈이다. 그이는 우리 가게에서 팔 물건을 구하려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르는 의류 도매회사 사장이었다. 그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설 적마다 “앵꺼라”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드라마 <주몽>에 자주 나오는 “앉거라”라는 대사였다. 누가 방에 들어오기만 하면 “앉거라”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니, 중국 사람은 그것이 한국식 인사인 줄 알고 있었다. 그가 내게 <대장금> DVD를 보라며 빌려주었다. 그 무렵 ‘한류’라는 용어가 캐나다에도 등장했다. 캐나다 신문은 ‘Hallyu’라고 적었다.

2017년 혁오밴드 토론토 콘서트. 딸 아이가 고교시절 친구와 함께 가서 찍은 공연 장면이다. 북미에서는 한국 밴드나 아이돌 그룹의 크고 작은 공연이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Jac Viner 제공

한국 대중문화는 내가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해도 이렇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매체는 DVD와 인터넷이었다. 나에게 다가온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퍼지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나 같은 어른들 모르게 온라인을 통해 캐나다 젊은층에 은밀하게 스며드는 한국 대중문화가 있었다. 물론 그 첨병은 한국 대중음악, 곧 K팝이었다.

나는 한국 대중음악이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에서 어떻게 퍼지게 되었는가를 우리 둘째아이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살 때 캐나다로 건너온 딸아이는 유치원에 들어가자마자 한국 말을 금세 잊어버렸다. 한글학교에 보냈으나 가르치는 방식이 맞지 않았는지 한글학교 가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다. 서너 살 때만 해도 우리말을 곧잘 하던 아이였으나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집에서도 영어만 사용했다.

나중에 한국에 보내서 우리말을 배우게 해야겠다고 여기던 차에 신기한 일이 생겨났다.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말과 글에 부쩍 관심을 보였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경로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을 접하고 푹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와 ‘소녀시대’가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자발적인 한글 공부였다. 한국말을 하고 한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또래 팬들 사이에서는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우리는 딸아이에게 K팝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 덕분에 나는 슈퍼주니어와 소녀시대 멤버들의 이름까지 다 외웠다. 아이와 우리말로 대화하는 데 그만큼 좋은 소재거리도 없었다. 서울에서 누가 오기라도 하면 한국 아이돌 그룹 CD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한글을 스스로 배우고 익히는 게 신통해서 선뜻 약속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키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K팝의 양상은 마치 땅속에서 개미굴이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 같은 어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전례가 없는 K팝의 세계가 급속도로 건설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의 보이그룹 B.A.P.가 신인이었을 당시 토론토에는 이미 팬클럽이 만들어져 있었다. 언론도 모르고 어른들도 몰랐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아이는 가사를 영어로 번역할 줄 안다는 이유로 팬클럽 임원진에 소속되어 주로 대학생인 언니들과 토론토의 커뮤니티센터에서 각종 행사를 수시로 만들어냈다. 음악과 영상을 틀어놓고 자기들끼리 즐기는 일종의 콘서트였다. B.A.P. 멤버들과도 영상으로 만났다. B.A.P.가 토론토에 공연을 오면 반드시 콘서트장을 찾았다.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적마다 아이를 차로 실어날라야 했다. 고단한 일이었다.

K팝을 매개로 한 온라인 만남을 통해 아이는 캐나다를 넘어 세계 각국 친구들을 다양하게 사귀었다. 물리적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 호주, 싱가포르 등에서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들과는 지금도 교류하고 서로 오가면서 직접 만나기도 있다.

딸아이를 태우고 왕복 2000㎞ 가까이 운전을 한 적도 있다. 2011년 10월23일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월드투어’를 보기 위해서였다. 10시간을 운전해서 갔으나 그 정도로는 고생했다고 내세울 바가 아니었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15시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2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미국인 여학생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이 한꺼번에 출연한 종합선물세트 같은 그런 공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아이돌 그룹이 단독 콘서트를 열어도 표 구하기 전쟁이 벌어졌다. BTS 공연 티켓을 구하는 것은 인터넷 속도와 자판 빨리 누르기 능력에 달렸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10년 전 빅뱅이나 투애니원의 북미 공연에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20세기 중후반 한국이 압축 성장을 했다면 21세기 들어서는 초압축 성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 경제나 사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도, 대중문화의 초압축 성장과 발전은 말 그대로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빅뱅(대폭발)이었다. 내가 보기에, BTS나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연이어 터져나오는 초대형 히트작보다 무서운 것은 따로 있다. 이것 역시 나 같은 기성세대는 잘 모르는 개미소굴 같은 것이다.

딸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되었으나 K팝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K팝이라고 따로 구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음악으로 듣고 보고 즐기기에 이르렀다. K팝을 필두로 한 한국 대중문화가 (물론 좋은 의미로) ‘무섭다’는 것은 캐나다 젊은층에 요란하지 않고 조용하게 스며들어서, 이제는 주류의 유력한 한 갈래로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의 가장 유력한 사례는 한국 뮤지션들의 북미 순회 공연이다.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월드투어’ 공연 이후 아이돌이나 밴드 그룹의 북미 순회 공연은 이제 특별한 일도 아니다. 토론토에서 자주 열리는 한국 뮤지션들의 1000석 규모 공연장 표는 거의 대부분 매진된다. 딸아이가 가장 최근에 보고 온 공연은 3월26일 ‘새소년’ 콘서트였다. 아이가 고교시절부터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열린 K팝 콘서트장을 찾아다녔으니, K팝의 ‘북미투어’ 역사도 이제 10년 가까이 되었다.

K팝을 필두로 한 한국 대중문화의 북미 확산세는 눈부심을 넘어 이제는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토론토의 극장에서 한국 영화를 상영한 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토론토 개봉관에서 한국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그저 신기해서 <광해> <역린> <베를린> <도둑들> <국제시장> <명량> 같은 영화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한국 영화의 극장 상영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다. 당연하고 평범한 일일 따름이다. 한국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전해준다는 핑계로 낯선 사람을 만난 것이 불과 20년 전 일이다. 한국 대중문화 즐기기에 관한 한 경천동지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고 보면 된다.

최근 몇년 사이에 이루어진 가장 큰 변화는 이른바 ‘안방극장’이다. 화질 나쁜 녹화 테이프를 빌려다가 한국 드라마를 보던 환경이 이제는 한국과 같은 시간에, 똑같은 화질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넷플릭스를 비롯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경로도 다양하다. 지금은 토론토에서 외국 영화와 드라마를 한글 자막으로 보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 대중문화 즐기기로 말하자면, 나 같은 한국 이민자는 지금 전례없는 복을 누리고 있다. 주말 아침이면 우리 부부는 베이글과 커피로 식사를 하면서 한국의 토·일 저녁 드라마를 시청한다. 몇년째 지속되어온 주말 아침의 일상이다. 한국 드라마 덕분에 우리의 주말 아침은 늘 느긋하고 행복하다.

▶성우제

캐나다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원(原)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일하다 200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16년째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다. 재외동포문학상을 두 차례(소설 및 산문 부문) 수상했고 <느리게 가는 버스> <딸깍 열어주다> 등 단행본 5권을 냈다.

성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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