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의 티키타카(25화)[연재소설]

에린 입력 2022. 5. 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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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세라는 라멘집에서 퇴근하면 바로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요시메 상이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바빠졌다.

“요시메 상이랑 얘기 잘 됐어요?”

캡틴이 커피를 내리며 세라에게 물었다.

“아니요. 언제 정신이 돌아오실지 모르니까 그게 좀….”

세라가 답답해하자 캡틴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하루마와 얘기해 보는 건 어때요?”

“하루마가 누군데요?”

“아, 요시메 상 아들이에요. 아카시와 친구이기도 하고. 오늘 가게에 나오는 날인데.”

“아드님과 얘기하더라도 할머니한테 직접 승낙을 받고 싶어요.”

세라의 뜻은 강건했다. 요시메가 정신이 온전할 때를 기다려 원료 사업을 얘기하고 싶었다. 그녀가 니코리에게 모든 걸 준다고 했지만, 세라는 누구인지도 모를 니코리 행세를 하며 그녀가 이뤄낸 결과물을 훔치듯 가져오고 싶지는 않았다.

“세라 씨 마음은 잘 알겠는데, 이런 일은 미룬다고 좋을 게 없어요. 잘 생각해 봐요.”

며칠이 지나도 요시메의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종일 함께 있는 게 아니니 그녀가 언제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세라는 도경이 전망대에서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라고 했을 때 처음으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색 없이 응원하는 그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힘이 났다. 이번에는 하루마라도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라멘집에는 대기하는 손님들로 출입문이 복잡했다. 세라는 사람들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왔다. 늦게까지 근무하는 날이면 네온사인 불빛 때문에 하늘이 더 짙어 보였다. 도톤보리 강 주변에 이른 취객들이 한두 명씩 보였다. 세라는 하루마를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마음속으로 준비했다.

도톤보리 강 다리 난간에 기대어 있던 한 취객이 몸을 추스르고 걷기 시작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비틀거렸다. 잠시 멈춰 하늘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쳤다.

도경은 취객의 뒷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봤다. 캐논에서 주최하는 사진 공모전을 떠올리며 상금이 천만 원이라는 기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취객이 양복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허리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셔츠 자락은 꼬깃꼬깃하게 구겨져 있었다. 대형 간판의 글리코상의 활기찬 모습과는 대조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도경이 손가락으로 사각 프레임을 만들어 취객의 모습을 쫓았다. 그러다 불쑥 카메라를 꺼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조리개를 조절했다.

취객의 몸짓을 따라 셔터를 누르는 도경의 렌즈 안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좁은 보폭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남자는 위태롭게 걸었고 앞에서 걷고 있는 여자 쪽으로 비틀댔다. 여자가 제 속도로 계속 걷는다면 뒤에서 중심을 잃은 그와 부딪칠 것 같았다.

세라는 요시메의 갈락토미네스 발효여과물에 로즈워터를 섞어서 화장수로 테스트해 볼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샘플을 만들어 하루마에게 보여주면 어쩌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몰랐다. 그 순간 누군가 세라의 신발 뒤축을 밟아 운동화 한 짝이 벗겨졌다. 세라는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낯선 남자가 술내를 풍기며 세라의 코끝까지 얼굴을 디밀었다.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린 남자가 휘청거리며 세라에게 몸을 기울였다. 세라는 피할 새도 없이 그 자리에서 눈을 찔끔 감고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누군가 세라의 팔을 잡아당겼다.


“악!”

세라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취객은 혼자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카메라가 바닥에 떨어졌다.

“똑바로 보고 다녀!”

도경이 취객에게 소리쳤다.

그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양복 재킷을 주운 뒤 주춤거리며 걸어갔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길거리에서!”

세라의 팔을 잡은 채 도경이 눈썹을 치켜떴다.

세라는 긴장했던 어깨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다.

도경의 카메라가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매일 마른 헝겊으로 정성 들여 카메라를 닦는 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비둘기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다가 부리로 카메라를 찍어댔다. 도경이 짜증 섞인 얼굴로 카메라를 주웠다.

“카메라… 괜찮아요?”

세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도경이 입바람을 불며 카메라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아이씨, 짜증 나네! 완전히 나갔어.”

헐거워서 테이프로 붙여놨던 배터리 커버가 떨어지면서 두 동강이 났다. 도경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세라를 주눅 들게 했다. 세라는 조용히 옆에 있다가 그의 카메라 브랜드 로고를 한참 쳐다봤다.

화장품 가게의 문은 닫혀 있었다. 세라는 가져온 서류봉투를 두 팔로 안았다. 가게 문을 빼꼼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시메 상.”

작은 목소리로 부르며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내실에서 얇은 바람막이 점퍼를 입은 남자가 나왔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요시메 상은 어디 가셨나요?”

“어머니는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혹시, 하루마 상이신가요?”

“그렇습니다만.”

“안녕하세요. 저는 유세라예요. 요 앞 캡틴 게스트하우스에 살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낯이 익네요. 근데 무슨 볼일이라도.”

“저, 어머님 일로 상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세라는 이렇게 된 이상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요시메에게 말했던 화장품 원료 사업에 대해 아들에게 설명했다. 하루마는 귀담아들으면서도 세라를 의심의 눈초리로 유심히 살폈다. 세라가 캡틴과 아카시의 얘기를 곁들이자 경계하던 눈빛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저도 전적으로 어머니 의견에 따를 겁니다. 그건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당연한 말씀이세요. 저도 요시메 상이 온전한 정신이 드셨을 때 사업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요. 하루마 상이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세라는 사업 설명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그에게 건넸다.

“맑은 정신이 드셨을 때 꼭 보여 드리세요. 구체적인 사업 설명이 돼 있어요.”

“네, 그러죠.”

그는 테이블 위에 있는 가방 안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런데,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니코리가 누군지 아세요?”

“니코리요? 당신이 어떻게….”

하루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를 통해서 들은 요시메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 시장이 생겼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갔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생선 가게를 크게 하셨대요. 전쟁이 나면서 할아버지는 생선 가게를 접고 친구분과 군수물자 사업에 뛰어드셨다고 하더군요. 제 생각에는 그게 화근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세라는 귀를 기울였다.

“삼촌이 있었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지만…. 삼촌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무척 아꼈다고 해요. 할머니는 남매지간에 우애가 유별났다고, 저와 동생이 싸울 때면 항상 그 말씀을 하셨어요. 잠시만요.”

그는 내실로 들어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아마, 어머니가 열 살 정도 됐을까요. 삼촌이 경찰예비대에 입대한 게 열일곱 살이라고 했으니까요.”

“경찰예비대요?”

“할아버지의 결정이었죠. 전쟁통에 경찰예비대에 들어가면 군 간부로 이관될 확률이 높다는 이유에서였대요. 삼촌이 입대하고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벽면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삼촌은 군대에서 총기사고로 스무 살에 죽고 말았죠. 할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삼촌이 죽었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하시더라고요.”

“아! 어쩌다가….”

“세라 씨도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건 아시죠?

“네.”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저한테 오빠라고 부를 때가 있어요.”

“그럼. 혹시 니코리는….”

세라는 찻잔을 든 손에 힘을 줬다.

“삼촌이 부르던 어머니의 애칭이었어요.”

“아, 그랬군요.”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예요. 하지만 왜 세라 씨한테 니코리라고 하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세라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면서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요시메의 주름진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겹쳐져 하나로 보였다 사라졌다. 요시메가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기억의 한 부분이 있다면, 니코리로 불리던 유년의 시절이 아니었을까. 세라는 가장 찬란했던 지난 인생의 한 장면이, 남은 생을 지탱해 주는 한 줄기 빛이 된다면, 과거 속에 영원히 산다 해도 그리 불행할 것 같지 않았다.

하루마는 가게 안을 정리하고 일찍 문을 닫으려던 참이었다. 세라가 준 서류봉투를 가방에 넣은 걸 다시 확인하며 불을 끄고 가게에서 나왔다.

“실례합니다만, 여기가 미우라 요시메 상 화장품 가게인가요?”

그는 낯선 목소리에 뒤돌아봤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머리를 묶은 여자는 하늘색 재킷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입술에 바른 빨간색 립스틱은 도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반짝이는 구두는 이 시장 골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도해 보였다.


■에린은 누구?

본명은 조선희다. 2020년 단편소설 ‘해시태그, 스타북스’를 한국문예에 발표했으며, 2021년 ‘바오밥 나무’를 동 문예지에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소설 아카데미와 동인회 청맥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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