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환대는 인류의 의무다[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2. 5. 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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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세 권이 국내에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Matilda Rahm

바닷가에서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황유원 옮김|문학동네|424쪽|1만6000원



낙원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왕은철 옮김|문학동네|348쪽|1만5000원



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강동혁 옮김|문학동네|428쪽|1만6000원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탄자니아 출신 영국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4)의 소설이 처음으로 국내에 번역돼 출간됐다. 수상 소식을 듣고도 그 작품을 접할 길 없었던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다. 아시아에서 그의 작품이 번역돼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동아프리카 출신 영국 작가가 쓴 소설은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에게 낯설고도 먼 이야기였다.

이번에 동시 출간된 <바닷가에서> <낙원> <그후의 삶>을 보면, 우리와 그다지 먼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아프리카에 대한 묘사는 이국적이고 매혹적이지만, 그가 영국을 배경으로 그려내는 난민·이슬람·흑인으로서 겪은 차별과 배제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구르나는 지난 18일 온라인을 통해 한국 언론인들과 만나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주의의 조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동아프리카는 문화적·종교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지역들과 교류하면서 수백년간 역사를 쌓아왔다”며 “단순히 동아프리카 이야기라고 할 수 없고, 역사뿐 아니라 동시대의 이야기도 함께 다루고자 했다”고 말했다.

구르나의 삶 자체가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주의 만남의 결과다. 1948년 지금은 탄자니아의 일부가 된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 살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영국 식민지였던 잔지바르가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무슬림과 아랍인, 인도·아시아계 아프리카인들을 탄압하고 살해했다. 무슬림인 그는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바닷가에서>는 어린 나이에 영국으로 망명한 작가 본인의 경험이 투영된 소설이다. 30년의 시차를 두고 영국으로 망명한 두 난민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예순다섯의 나이에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 주인공 오마르와 그보다 30년 앞서 10대 때 영국으로 건너온 대학교수이자 시인인 라티프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특히 라티프는 작가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는 영국에 지식인으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간다. 흑인이자 무슬림인 작가가 백인·기독교 중심의 영국 사회에서 경험한 차별과 배제, 이질감의 벽은 높았을 것이다.

오마르가 공항에서 처음 들은 말이 “망명은 젊은이들이 벌이는 게임이고 탐욕” “우리는 당신들이 여기 있길 원치 않는다”였다면, 라티프는 길에서 마주친 중년 백인에게 “블랙어무어(blackamoor·흑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라는 야유를 듣는다.

인물이 처한 상황은 무겁고 우울하지만, 소설의 이야기는 흡입력 있게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오마르와 라티프 두 집안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가 두 화자의 교차되는 목소리를 통해 드러나는데, 이를 좇는 과정은 마치 ‘천일야화’를 듣는 듯 흥미롭다.

지난 1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온라인 기자간담회를 한국 언론과 가졌다. 문학동네 제공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동아프리카는 유럽 대 아프리카, 흑인 대 백인의 단순한 이분법 구도를 넘어 다채롭고 역동적인 공간으로 되살아난다. ‘납작한 지도’를 통해 유럽 중심의 시각으로 세계를 인식했던 우리에게 인도인·페르시아인·아시아인·아랍인·유럽인이 뒤섞여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혼종적 공간이었던 동아프리카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성취 중 하나다. 독자들은 곰팡이에 감염된 침향나무에서만 맡을 수 있는 아름다운 향 우드알카마리와 같은 이국적 감각에 매료되는 동시에, 영국 식민주의의 폭력과 횡포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들을 수 있다.

“세상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을 어떤 영역처럼, 단지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것이 아닌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바로 지도”다. 그 지도로 인식돼 왔던 동아프리카에서 개개인의 삶을 건져올린 구르나는 역사의 격류에 휩쓸린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오마르와 라티프의 집안은 원한과 악의로 얼룩졌지만, 두 사람은 낯선 영국 땅에서 비로소 오해를 넘어서 이해와 연대에 도달한다.

그들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한 구절을 마치 신호처럼 인용하는데, 정작 그 구절을 백인들은 알지 못한다. 이는 재치있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제국의 문화를 익혀야만 했던 피지배 민족의 애환과 대조되면서 냉소어린 비판이 빛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낙원>은 세 소설 가운데 가장 초기작으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시기의 탄자니아를 배경으로 한다. 열두 살 소년 유수프의 성장기와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통해 변화 직전 벼랑 끝에 내몰린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그린다. 지난해 출간된 최근작 <그후의 삶>은 1907년쯤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배 당시 벌어진 저항과 반란을 배경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과 삶을 다룬다.

구르나는 “인류는 전쟁, 폭력, 궁핍으로 삶의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환영하고 환대할 의무가 있다”면서 “문학을 통해서 타인의 삶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으며 문학이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한국전쟁 시기 해외로 떠나 ‘난민’이 되었던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놓고 반대 여론이 분분했던 한국의 독자들에게 구르나의 소설들은 낯선 곳에서 도착한 익숙한 이야기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Mark Pringle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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