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로의 적치물이 아니라 생계 공간의 '사람'입니다[책과 삶]

김종목 기자 2022. 5. 2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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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92년 노점상 시위. 빈민운동가 최인기는 노점상의 비극이 군사 정권부터 진보 표방 정권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가난의 도시 : 우리 시대 노점상을 말하다
최인기 지음|나름북스|330쪽|1만6000원

노점상단체에서 30여년간 활동한 빈민운동가 최인기는 “노점상은 생계를 위해 마지막으로 거리를 선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선택지에서 ‘불법’이라는 굴레에 내몰리고, ‘잡상인’ 취급당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이슬(露·노)을 맞으며 고달프게 장사하는 사람”들의 삶은 유린당하기 일쑤였다.

비극은 군사 정권부터 진보 표방 정권까지 이어졌다. 89일 동안 병원에서 생사를 헤매던 ‘거제도 노점상 이재식’은 1989년 12월11일 운명한다. 37세였다. 1985~1989년 여러 공장을 다니면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다 해고 위협과 감시 등에 못 이겨 현장 노동자 생활을 정리하고 시작한 게 노점과 신문 배달이다. 새벽에 한겨레 신문을 돌리고, 낮에 호떡을 팔았다. 여러 노동 운동에 연대했다. 그해 10월16일 경남 거제시 단속반이 신현읍 농촌지도소 앞 호떡 손수레를 끌고 가버렸다. 손수레를 돌려달라는 호소에 읍장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낮 12시40분쯤 이재식은 분신했다. 유서에 “이 몸 불살라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고 적었다.

“아빠와 인사도 나누지 못했는데 열사의 딸”이 된 이근혜의 삶도 기구하다. 이주노동자 인권운동을 하던 네팔 청년 노동자와 결혼해 명동성당 근처에 네팔 음식점 ‘포탈라 레스토랑’을 열었는데, 재개발로 헐린다.

서울 중구 서울시청 동편에서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철거민연합 등이 모여 불평등 타파 및 생존권 쟁취를 주장하는 2021 전국빈민대회를 열었다. 한수빈 기자


노점상 투쟁사와 죽음엔 장애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1994년 6월 어느 날 서울 서초구 방배역 근처에서 테이프 노점상 등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1급 1호의 중증 장애인 최정환은 불시 단속에 한쪽 다리마저 부러진다. 이듬해 3월8일 서초구 단속반에 스피커와 배터리 통을 빼앗긴다. 물품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구청 담당자는 거부한다. 그날 밤 분신한 최정환은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다 3월21일 세상을 떠났다.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내 한목숨 죽어도 좋다. 복수해달라”라는 말을 남겼다.

최정환 장례 이후 장애인과 노점상이 결성한 ‘장애인 자립 추진위원회’에 1998년 합류한 이가 최옥란이다. 뇌성마비 1급 중증 장애인인 그는 ‘여성’ ‘노점상’ ‘장애인’의 삼중고를 겪으며 살았다. 전 남편에겐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서울 청계천 8가에서 장난감과 치약, 구제 옷 등을 팔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 대상이었지만, 노점을 계속하면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수급자가 되기 위한 소득 기준 상한선이 33만원이었다. 최저생활을 보장하려 마련한 제도는 생계를 위협하는 ‘이상한 제도’였다. 최옥란은 2001년 12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 농성’에 들어갔다. 12월7일 보건복지부 장관 집 앞에 수급비 28만6000원을 반납했다. 이듬해 사망했다. “노동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그나마 거리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어서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을 찾으려고 힘이 들어도 참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거리에서 장사도 못하게 하니 이제는 더 살 수 없는 심정입니다 다시는 저와 같은 동료들 상처받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라고 유서에 담았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장애인 노점상 시위.

2006년 6월20일 인천 부평 공원에서 장사하던 지체 장애 2급 주수길은 용역 단속 와중에 “맥주병에 맞아 힘없이 쓰러졌다”(목격자 증언)고 한다. 병원에 이송됐지만 치료받지 못한 채 귀가했다. 다음날 시신으로 발견됐다. 주수길의 죽음엔 또 다른 비극이 서려 있다. “이날 고용된 용역반 중에는 장애인들도 있었다. 장애인 용역이 장애인 노점상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최인기는 “용역과 노점상 모두 빈곤정책의 사각지대에서 생긴 폭력의 희생자”라고 말한다.

“어떤 아름다운 수사로 그 밤을 형상화해줄까/ 잘난 것 없는 죄, 못 배운 죄 억울해/ 붕어빵 순대 떡볶이 팔아 대학공부시키는/ 자식들 마음 아플까봐 몰래 숨죽여 울며/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여보, 미안해 여보, 미안해 사죄하며/ 부르튼 아내 손 꼭 잡은 채 잠들지 못했다는 그 밤을.”

시인 송경동이 2007년 10월11일 고양시 주엽역 태영프라자 앞에서 용역 깡패들과 구청 직원들에게 붕어빵 틀과 리어카를 지키려다 폭행당한 뒤 다음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근재를 위해 지은 ‘비시적인 삶들을 위한 편파적인 노래’ 중 한 연이다. 아내에게 마지막 남긴 말이 “미안하다. 세상 살기 힘들다”였다.

강북구 삼양동에 갈치 노점을 하던 박단순도 정권 교체 다음 달인 2017년 6월 단속 와중에 쓰러졌다. “단순씨가 (용역 깡패에게) ‘그러지 마라, 얼음 다 녹는다, 뚜껑을 덮어놔야지’라면서 갈치 상자를 한쪽으로 치웠는데 그러자마자 쓰러졌어요. 그리고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워 꿈쩍도 안 하더라고요. 부랴부랴 병원에 실려 갔는데 며칠 후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어요,” 박단순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 누구보다 노력”한 노점상 동료 서원자의 증언이다.

최인기는 청계천 복원과 디자인서울 때 사라진 노점상들의 투쟁기도 좇는다. 이 투쟁사에서 노점상을 저항과 연대의 주체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 ‘노점상’은 1980년대 이래 스스로 조직하고 단속에 맞서 저항하며 비하를 거부하고 쟁취한 단어다. 단속, 시위 등 과격한 이미지가 덧씌워졌어도 사회 변화에 동참한 저항의 주체로서 ‘노점상’으로 불려야 한다”고 했다.

책은 삼국시대 보부상과 조선의 난전 역사도 살핀다. 대중문화 속 노점상, 법과 제도, 해외 사례까지 아우른다. 최인기는 “도로의 본래 기능인 원활한 통행권을 충분히 보장하는 형태로 상행위를 했을 경우 정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상인의 입장, “모든 국민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제15조)의 잣대에서 제도·정책 문제를 들여다본다.

“노점상을 포함한 비공식 경제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2002년 국제노동기구(ILO) 총회의 결의, 전체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노점상의 월평균 가구 총소득 182만2000원(2020년) 등을 근거로 ‘노점상 생계 보호를 위한 특별법’을 제안한다. 노점상을 문제 해결 주체로 인정하자고 했다. 노점상들에게도 “생계를 위해 거리로 나선 사람이지만, 거리는 공공의 공간이며 시민 모두의 소유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최인기가 책 내내 강조하는 건 노점상이 적치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이다. 거리는 “보행의 의미를 넘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곳이었고 소통하며 삶을 나누던 장소”였다. ‘가난의 도시’라는 제목의 책은 ‘소유권 절대’ 원칙으로 ‘권력과 돈’ 중심으로 재편된 도시 공간에 대한 비판서이기도 하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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