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행복했던 유년의 추억

진회숙 기자 2022. 5. 20. 11: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진회숙 음악평론가

여섯 살 때 당진 외가에 찾아가

지적장애 삼촌과 친구처럼 놀아

얼마나 원 없이 재밌게 보냈던지

한 달 만에 충청도 사투리 술술

외할아버지·삼촌이 보여준 애정

오늘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

사람은 누구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다. 그 행복했던 기억은 대부분 잘 ‘놀았던’ 기억일 것이다.

나에게도 치열하게, 일분일초도 아끼지 않고, 내 모든 오감을 동원해 열심히 놀았던 추억이 있다. 그때는 정말 하루해가 지는 것이 아까울 정도였다. 밖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엄마가 이제 집에 들어오라고 부르곤 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싫었던지…. 밖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데, 이 업무를 밤새 처리해도 안 되는데 들어오라고 하다니.

나는 본래 서울의 삼청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어렸을 때 그곳을 떠나서 그런지 그 시절에 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과거를 추적해 올라가는 내 기억의 끝은 항상 황금 같은 유년기를 보낸 파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멈추곤 한다.

그곳은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처럼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는 곳이었다. 하늘과 맞닿아 완만한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뒷동산을 배경으로 초가집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그 앞으로는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버섯이나 나리꽃, 진달래, 아까시꽃, 송화, 할미꽃 등을 꺾으러 다녔고, 한창 더울 때는 마을 앞의 시내로 헤엄을 치러 갔다.

비 오는 날이면 모두 대바구니를 들고 시냇가로 나갔다. 비로 인해 물이 엄청 불어난 흙탕물 속으로 들어가 풀숲에 발을 집어넣고 한참 휘저은 다음 바구니를 꺼내 보면 그 안에 미꾸라지가 몇 마리씩 들어 있곤 했다. 그뿐인가. 논에서 우렁이를 잡아 삶아 먹기도 했고, 메뚜기를 잡아 강아지풀에 꿰어 집으로 가지고 온 다음 양은 냄비에 볶아 먹기도 했다.

당시 나는 자연 현상에 관한 탐구 정신이 남달랐다. 하늘의 달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달이 따라 움직인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른다. 나는 입에 침을 튀겨 가며 동네 아이들에게 내가 독창적으로 발견한 이 놀라운 자연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자기들이 움직일 때도 달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과학적 실험 끝에 도출된 나의 ‘월동설(月動說)’은 동네 아이들의 경험칙 앞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시골을 배경으로 한 어린 시절의 장면에서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여섯 살 때 충남 당진에 있는 외할아버지댁으로 놀러 갔던 기억이다. 거기서 보낸 한 달이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하고도 재미있게 놀았지만, 당시 열여덟 살이던 막내 외삼촌하고 놀았던 기억이 특히 생생하다. 막내 외삼촌은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래서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지만 여섯 살인 나와 수준이 맞았다. 말도 잘 통하고 놀이 취향도 비슷했다. 그때는 외삼촌이 그냥 친구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외삼촌이 내가 애써 잡은 논우렁이(이게 얼마나 맛있는지 먹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를 모두 닭에게 모이로 주는 참사가 일어났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정말 엉엉 울면서 외삼촌에게 마구 앙탈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쩔쩔매던 외삼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같이 놀면서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던 것 같다.

당진에서 보낸 한 달 동안 나는 인자한 외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 아래 천진난만한 철부지 외삼촌과 함께 산과 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원도 한도 없이 마음껏 놀았다. 그야말로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해가 떠 있는 모든 시간을 충실하게, 농도 짙게 보냈다. 밤이 오는 것이 아까워 열과 성을 다해 놀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서울말은 완전히 잊고, 충청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어 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어린아이가 사투리를 체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당시 나는 모든 말의 종결어미를 “∼유”나 “∼슈”로 처리했다. 이런 말투가 완전히 입에 배어서 집에 돌아와서 한동안 그 말투를 고치지 못했다. 그게 재미있었는지 동네 아줌마들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켰고, 내가 말을 시작하면 모두 박장대소했다. 완전히 동네 구경거리가 되었는데, 동네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인기 좀 끌었다. 물론 그로부터 한 달 만에 다시 완전한 서울말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이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충청도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무척 정겹다. 사투리와 함께 외할아버지 집에서 즐겁게 놀았던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그때 나랑 같은 수준으로 놀았던 막내 외삼촌은 그로부터 얼마 후 농수로에 빠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에는 시골 농수로에 사람이 빠져 죽는 사고가 가끔 일어났다. 역시 시골에 사는 내 사촌 동생도 농수로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막내 외삼촌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구수한 사투리를 쓰던 외할아버지와 막내 외삼촌이 나에게 보여줬던 애정과 관심. 그것이 오늘의 나를 버티게 해주는 정서적 자산이다.

봄이 되니 문득 그 시절, 외삼촌이 그리워진다. 외삼촌이 세상을 떠난 계절에도 여전히 봄꽃들이 피어난다. 그 속절없음이 못내 서럽다.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