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료기기 '간납사' 갑질, 이대로 두면 안 된다

김현희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유통구조위원회 대외협력분과장(법무법인 수호 변호사) 2022. 5. 2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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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유통구조위원회 대외협력분과장(법무법인 수호 변호사)

지난 2019년 국내 대형병원에 의료기기를 납품하던 A간납사(간접납품회사) 부도로 18개 의료기기 업체들이 2억원 이상 피해를 입었다. 이 업체 중 거래계약서를 체결한 곳은 한 곳뿐이었고, 납품 담보를 설정한 업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한다. 물품을 납품하고 3년 동안 대금을 받지 못한 업체도 있었다. 업체들이 이 간납사에 H병원과 거래 중개 수수료로 낸 돈이 매출의 5.7~8.6%에 달했지만, 업체들은 수수료는 물론이고 대금조차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

지난 2021년 B간납사가 의료기기 공급내역 신고 의무 위반으로 받은 과태료 등 행정처분 비용을 의료기기 업체에 떠넘겨 논란이 됐다. B간납사는 의료기기 업체에 지급해야 할 대금에서 과태료를 뺀 나머지 금액만 입금했다고 한다. 식약처는 의료기기 유통 관리를 위해 지난 2020년부터 의료기기 제조, 수입, 유통 단계별 공급내역을 ‘통합정보시스템’에 보고하도록 했는데, 병원에 의료기기를 납품하는 상당수 간납사들이 이런 신고 의무를 업체들에 전가한 것이다. 어떤 간납사는 업체에 신고를 대신 하지 않으면 납품 대금을 늦게 주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한국 의료기기의 유통 구조의 문제점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이런 불공정거래 관행들이다. 우리나라 의료기기 시장에는 의료기기 구매의 절대 갑(甲)인 병원과 그 병원을 등에 업은 간납사와 의료기기 업체를 중심으로 불공정거래 관행이 만연해 있다. 이는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회원사들의 제보와 실태조사에서 확인된다.

의료기기 업계의 불공정거래관행은 크게 5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간납사가 물품대금 결제를 일부러 늦추는 행위다. 간납사가 의료기기 업체와 계약할 때 보증이나 담보 없이 6개월에서 1년 이상의 결제 기한을 두고 있다. 계약한 기한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납품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한 업체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두 번째는 납품가 후려치기다. 업계에서는 간납사가 병원 납품 계약을 수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가격 할인 경쟁의 비용을 의료기기 업체에 전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세 번째는 각종 수수료 청구다. 납품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사실상 의료기기 업체가 하는데, 간납사들은 정보이용료, 물류비, 세금계산서 발행 등 각종 명목으로 수수료를 챙긴다.

계약서 없이 물건부터 납품하게 하는 ‘가(假)납’ 행태도 문제다. 계약서가 없으니 납품일로부터 기산하는 대금 결제는 무기한 늘어진다. 미리 갖다 놓은 제품이 사용 기한을 넘기면, 새 제품으로 채워 넣는 비용도 고스란히 의료기기 업체 몫이 된다. 각종 책임 전가도 빠지지 않는다. 간납사들은 각종 수수료를 받으면서도, 납품 수량이 맞지 않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 업체에 책임을 떠넘긴다.

이런 관행의 근본적 원인은 의료기관의 의료기기 관리 비용이 법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치료 재료의 구매 및 품질 및 재고관리를 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비용이 발생한다. 하지만 의료법에서 병원에서 쓰는 의약품의 관리 비용은 인정하지만, 의료기기로 분류되는 수술용 실, 거즈 등의 치료 재료 관리 비용은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관리 비용을 병원이 부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병원은 비영리 기관이기 때문에 관리비를 부담할 만한 수익구조나 이윤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병원이 간납사에 관리 업무와 비용 부담을 전가하고 간납사는 다시 의료기기 업체에 이 비용을 전가하는 비정상적 구조가 굳어졌다.

이런 관행은 의료기기 산업의 발전은 물론 건강보험재정의 건전성도 위협한다. 의료기기 산업이 발전하려면 의료기기 유통구조의 문제점을 개선해야 한다. 가장 먼저 면밀한 실태조사를 통해 간납사의 불공정 행위를 파악해 그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지배구조와 설비, 인력 구성의 측면에서 의료기관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 전문성을 갖춘 업체가 도매업을 할 수 있도록 도매업 허가제를 도입하고 불공정 거래행위가 적발됐을 경우 허가 취소 등 강력한 제재를 해야 한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기기(치료재료)에 대한 관리료를 별도 수가로 책정해 의료기관에 지급하도록 하는 등 의료기기에 대한 관리료도 신설해야 한다. 의료기기를 구매한 의료기관이 관리의 주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구매 및 재고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병원이 간납사를 통해 의료기기 업체에 비용이나 업무를 전가하는 것을 원천 봉쇄할 수 있다.

의료기기 유통 관리 부처도 통합해야 한다. 의료기기의 제조 및 수입은 식약처로 전담한다. 그런데 판매 및 유통은 복지부와 식약처로 관리가 이원화돼 있다. 의료기기의 유통 관리 부처도 일원화해 정책의 일관성과 효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불합리한 의료기기 유통구조로 한 해 낭비되는 비용이 수천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낭비되는 자금이 연구개발(R&D)에 유입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는 국산 의료기기의 품질 향상과 의료기기산업 경쟁력 확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새 정부가 산업계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현명하게 정책을 입안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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