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공부하는가..'무지한 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 학자들이 말하는 ‘공부’
최재천 “바닥난 자존감 세우기”
김영민 “자기질문 만들어 논쟁”
장정일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함”
탁석산 “배움 통해서 존재 변화”
삶을 위한 공부의 기술도 담아
‘최재천의 공부’ 출간을 맞아 학자들이 남긴 공부에 관한 사유를 되짚는다. 스펙을 위한 공부에 열 올리느라 잃어버린 공부의 기쁨을, 잊어버린 공부의 참된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공부란 간판을 따는 수단이 아닌 부단한 자기수련의 과정이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대신 조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길이다.
한국 사회를 산다는 건 ‘공부의 압력’을 견디는 일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학원 뺑뺑이’를 돈다. 10대엔 좋은 대학에 가려고, 20대엔 번듯한 일자리를 가지려고 밤잠 설치며 공부한다. 부모가 시켜서, 남들 다 하니까 억지로 책상에 앉는 ‘강제된 교육’ 속에 공부의 기쁨을 맛볼 기회를 잃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의 말처럼 “한국은 일찍부터 입시에 정열을 바친다는 점에서 교육열이 강한 나라지만, 진정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육에 냉담한 나라”다.
‘통섭’의 화두를 제시한 생태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10여 년 전부터 공부의 의미를 탐색하는 책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 앞에 선 듯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가늠이 안 됐다. 이번 주 나온 ‘최재천의 공부’(김영사)는 오래 숙성된 고민이 맺은 결실이다. 최 교수와 재미 저널리스트 안희경의 대담을 엮은 책은 교육 시스템의 혁신을 촉구하며 ‘간판’이 아닌 ‘삶’을 위한 공부가 주는 활력을 예찬한다. 일찍이 최 교수 외에도 여러 학자와 작가가 공부에 흥미를 잃게 하는 환경이 안타까워 글을 남겼다.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김 교수는 2년 전 ‘공부란 무엇인가’(어크로스)라는 질문을 던졌고, 최근엔 철학자가 뇌과학 이론으로 학습법을 소개한 ‘탁석산의 공부수업’(열린책들)이 나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소설가의 눈으로 읽고 쓰는 행위를 성찰한 ‘장정일의 공부’(RHK)가 있다. ‘최재천의 공부’ 출간을 맞아 그들의 사유를 따라가며 공부의 존재 이유를 다시 숙고한다. ‘공부’를 ‘공부’한 학자들이 전하는 학습 기술도 알아본다.
◇“공부는 정교한 질문으로 논쟁에 뛰어드는 것”
김 교수는 공부란 정교한 ‘자기 질문’을 만들어 논쟁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공부가 쌓이면 논쟁에서 패배할지언정 ‘멍청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멍청한 비판이란 상대의 핵심 주장에 강점이 있음에도 얼핏 드러난 약점에 집착해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공부로 단련된 자만이 강점에 주목하며 비판적으로 ‘맞짱’ 뜰 수 있다. 물론 공부에 ‘효용’만 있는 건 아니다. “왜 공부하는가”라는 질문에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라고 답하는 김 교수는 “공부를 통해 무지했던 과거의 나로부터 도망치는 재미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은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어차피 남이 아닌가”라면서.
최 교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무엇을 배워야 할까’라는 질문에 닿는다고 적는다. 그에게 공부는 그저 학문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들여다보며 바닥난 자존감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인간 사회와 자연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기 위한 분투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알아가는 노력이 축적될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공부와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라고 단언한다. 앎이 이해로, 공감으로 이어질 때 공론장이 “일방 변론이 아닌 쌍방 숙론으로” 활기를 띨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 교수는 교육 혁신을 위해 “부모들과 함께 촛불집회를 기획하고 싶다”며 “아이들에게 삶을 즐길 권리를 되찾아주자고 ‘선창’할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으로 도발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장정일은 공부하는 이유도 남다르다. 많은 한국인처럼 그 역시 어릴 때부터 ‘중용을 취해라’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는 말을 따갑게 들었다. 이런 가르침 아래 중용의 사람이 되려 노력했으나 남은 건 ‘무식’과 ‘무지’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떤 사안에서든 중립과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 아니라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독파한 인문학 에세이 ‘장정일의 공부’에서 이렇게 외친다. “우리 사회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양비론의 천사’가 너무 많다. 새삼 다시 공부하게 된 이유는 극단으로 가기 위해, 확실하게 편들기 위해,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차 두기, 기획 독서, 모순 없는 글쓰기… 삶을 위한 공부의 기술
‘점수 따는 공부’가 아니라 ‘더 나은 삶에 이르는 공부’에도 비법이 있다. 학자들은 학문의 길에서 터득한 숙련된 ‘정도’를 소개한다. 최 교수는 ‘취미 독서’가 아닌 ‘기획 독서’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편다. “독서는 일이어야만 한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진다. 학문은 연결돼 있기에 ‘빡세게’ 읽어 나가면 새 분야의 책을 접할 때 전보다 덜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적 기초’를 쌓지 않으면 ‘지적 감기’에 시달리게 된다며 글쓰기의 기본을 논한다. 특히 세상을 향한 논설문이나 학문적 글은 사회 모순을 직시하되 가능한 한 ‘모순 없는 문장’으로 주장을 펼치라고 충고한다. 예컨대 장애우라는 신조어는 장애를 지닌 이에게 어떻게 들릴지 고민해보고, 정부·사회·공동체처럼 유사하지만 다른 단어는 뜻을 판별해 맥락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순 없는 문장이 오갈 때 오해의 여지는 줄고, 타협의 가능성은 커진다. “공부란 모호함을 벗어나 명료함으로 향하는 과정이다. 모호한 표현을 자제하는 훈련은 민주주의 덕목 함양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서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철학자 탁석산은 ‘시차 두기’ 학습을 강조한다. 벼락치기 대신 며칠에 걸쳐 공부하면 적은 노력으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시차 두기가 효과적인 이유는 우리가 잠을 자기 때문이다. 신경세포인 뉴런은 ‘공부한 뒤 잠들었을 때’ 가장 크게 바뀐다. 이와 함께 탁석산은 ‘25분간 집중력 훈련하기’를 제안한다. 뇌과학자들은 사람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최대치가 25분이라고 설명한다. 25분간은 어떤 잡념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읽고 생각하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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