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지도자는 말·행동보다 중요한게 '숨겨진 본색'.. 국가 운명도 바꿔"
■ M 인터뷰 - ‘지도자 본색’ 펴낸 김덕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로마 지도자 9인 유형별 살펴
한국 사회문제 로마와 빼닮아
1인자들 자질·능력 내세우고
권력욕 등 본색은 철저히 숨겨
‘나 아니면 안돼’그라쿠스 개혁
반발에 전횡 일삼다 결국 좌초
文, 지지층만 바라보며 국정
애초의 명분 잃고 독선에 빠져
권력 나눈뒤 현실주의적 개혁
尹‘상대 품는 협치형’배워야
새 정부 출범 후 열흘이 흘렀다. 윤석열 대통령은 팬데믹 위기를 극복하고,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협치(協治)를 구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과연 그는 이전 지도자들과 달리 통합과 화합의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박수 칠 때 떠나는 대통령이 되려면 어떤 리더십이 필요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최근 ‘지도자 본색’(위즈덤하우스)을 출간한 김덕수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를 찾아갔다. 책은 기원전 2세기 이후 굴곡진 로마사 500년을 이끈 지도자 9인의 ‘본색’을 유형별로 살펴본 교양서. 국가 흥망의 원인을 일인자의 본심에서 찾은 시도가 흥미롭다. 빈부 격차, 진영 대립 등 한국사회를 빼닮은 당대 로마의 모습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로마와 그리스도교’ 등을 쓴 김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로마사 권위자다. 지난 6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난 뒤 한 차례 더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금 로마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참조할 만한 이야기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로마는 2700여 년 전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제국이 됐다. 개혁과 반개혁, 내전의 혼란을 극복하고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열었다. 정면교사와 반면교사가 함께 있는 셈이다.”
―왜 지도자의 ‘자질’이나 ‘능력’이 아닌 ‘본색’에 주목했나.
“힘 있는 정치인도 선거를 앞두면 고개를 숙인다. 문제는 선택받기 위해 자질과 능력만 앞세울 뿐, 권력욕이나 탐욕 같은 본색은 감추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공동체를 이끌지 알기 힘들다. 말과 행동보다 중요한 것이 본색이다. 로마사에서도 지도자가 뒤늦게 드러낸 본색이 나라의 운명을 바꾼 장면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연일 ‘초당적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로마 지도자 중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은.
“로마 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협치를 통해 위기를 돌파했다. 미천한 노예의 아들이었던 그는 황가(皇家)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타고난 군사적 재능으로 장군의 자리에 올랐고, 전임 황제가 급사하며 기회를 잡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개 석상에서 정적의 목을 친 뒤 군인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됐다. 권력욕의 화신으로 보이지만, 사실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는 정적의 견제 속에서 큰 제국을 홀로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권력을 나눴다. 두 황제가 각각 부황제를 두고 나라를 운영하는 ‘4제 통치’를 도입한 것이다. 이 체제가 안착한 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행정부터 경제까지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며 로마의 번영을 이끌었다.”
―협치 구현을 위해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카이사르의 양자로 로마 최초의 황제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에게 ‘굴욕을 감내하는 태도’를 배워야 한다. 그는 19세가 되던 해 카이사르가 살해당하며 신변이 위태로워졌다. 당시 카이사르파 인물 가운데 실세로 자리를 굳힌 인물은 안토니우스였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재산과 공금을 마음대로 사용한 탓에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적힌 자신의 몫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훗날을 도모하며 자신과 안토니우스, 장군 레피두스가 로마를 분할 통치하는 ‘삼두 정치’에 합의했다. 물론 이 합의안 역시 세부 내용을 보면 나이와 경험이 부족한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장 불리했다. 이런 굴욕을 견뎠기에 그는 33세에 마침내 아그리파 장군의 도움으로 일인자가 될 수 있었다.”
책은 로마 지도자를 ‘상대를 품는 협치형’ ‘굴욕을 견디는 야심형’ 외에 ‘나만 옳다는 고집형’ ‘피를 부르는 청산형’ ‘선을 넘는 자기심취형’ 등으로 분류한다. 고집형의 대표 선수는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은 소수의 대지주가 부를 독점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적으로 활용하는 공유지의 상한선을 못 박는 농지법을 추진했다. 로마가 갈 길을 제대로 내다본 ‘선견지명의 지도자’였으나 기득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본색을 드러냈다. 상한선을 넘긴 공유지를 내놓으면 보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초안 내용마저 삭제해 더 과격한 법안을 만든 것이다.
반발하는 기득권을 뚫기엔 정치적 힘이 약했던 형제는 개혁의 동력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명분마저 잃어버린 개혁은 좌초됐고, 형제는 정적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유능한 행정가이자 장군이었으나 권력을 쥔 뒤 스스로 종신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를 ‘자기심취형’으로,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정적을 잔인하게 탄압한 술라를 ‘청산형’으로 규정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고집형에 가까운 정치인은 누구인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그 역시 그라쿠스 형제처럼 개혁을 바라는 시민의 응원을 업고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하지만 시장 메커니즘을 무시한 부동산 정책, 문제가 불거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끝까지 감싼 행태 등으로 ‘지지층만을 위한 반쪽 대통령’에 머물고 말았다. 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 세력이 ‘민주’는커녕 고집불통의 ‘독선’에 빠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문 전 대통령은 검찰 권력을 동원해 ‘적폐청산’을 밀어붙이다 반발을 사기도 했는데.
“정권이 바뀐 뒤 전임 정부의 법 위반이 발견되면 합당한 처벌을 해야 한다. 문제는 적폐청산 구호에 집착한 문재인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진영의 한(恨)’을 푸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는 법치주의에 입각하되 ‘정치 보복’에 나서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다만 더불어민주당이 아직도 20대 대선의 민심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입법 독재’로 일관하고 있어 우려스럽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을 강행 처리한 과정을 봐라. 야당이 의석만 믿고 자꾸 선을 넘으면 정국이 경색될 수밖에 없다. 술라의 적폐청산 역시 평민파와 귀족파의 극심한 충돌 속에 자행된 정치적 결정이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탄핵으로 불명예 퇴진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본색’은 무엇이었을까.
“사법적·정치적 판단이 끝난 문제에 덧붙일 얘기는 없다. 다만 역사학자로서 아쉬운 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이다. 대통령이 되면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고 싶다는 게 ‘박근혜의 본심’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는 5년마다 대선이 치러지는 것을 망각한 생각이다. 정권이 바뀌면 역사 교과서가 유신 독재에 대한 더 가혹한 비판으로 도배되지 않겠나. 박 전 대통령은 권력의 유한함을 인지하지 못한 ‘자기심취형 지도자’라고 볼 수 있겠다.”
―왜 한국엔 ‘유종의 미’를 거둔 지도자가 드문가.
“대한민국 건국 자체가 좌·우파의 대립 속에 이뤄졌다. 70년 넘게 흘렀으나 통합은커녕 진영 논리에 따른 이념 편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양극단에 있는 10∼20% 세력은 상대편을 무조건 깎아내린다. 지도자의 공과(功過)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민의식이 갖춰지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정치인은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다. ‘모두에게 박수받는 대통령’이 나오기 힘든 환경인 셈이다. 협치의 묘미를 보여 준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다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로마사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지도자였다. 부황제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치도록 60세에 월계관을 내려놓고 배추 농사를 짓다 생을 마감했다. 진영 다툼이 당장 사라지진 않겠지만, 권력을 나누고 물러날 때를 안다면 박수 받으며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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