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이엘, 봄비처럼 스며들다

아이즈 ize 박현민(칼럼니스트) 2022. 5. 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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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박현민(칼럼니스트)

사진제공=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배우 이엘의 매력이 안방극장에 스며들었다. 봄비처럼 느릿하고 촘촘하게, 그럼에도 아주 흠뻑.

JTBC 토일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극본 박해영, 연출 김석윤)는 여러모로 묘한 드라마다. 극 초반만 해도 영 익숙지 않은 느릿한 전개와 호흡, 내용 전반을 휘감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대사 결핍의 구씨(손석구)와 염미정(김지원), 대사 과잉인 염창희(이민기)와 염기정(이엘)과 뒤엉켜 보는 이를 몹시 힘들게(?) 했다. 이를 버티지 못하고 초반에 하차한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염기정은 짜증이 잔뜩 섞인 말투로 자신이 아는 모든 이를 헐뜯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사랑이 부재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분노를 날선 가시처럼 바깥으로 표출하기 급급했다. 물론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은 드라마가 초중반을 넘어서며 180도 반전됐다.

구씨와 염미정이 '추앙커플'로 떠오르며 시청자의 큰 관심과 지지를 받을 무렵, 염기정의 삶도 예기치 못한 변화에 직면했다. "아무나 사랑할거야"라고 다짐했던 염기정은, "제가 할게요. 아무나"라고 답해주는 싱글대디 조태훈(이기우)과 사랑에 빠져들었다. "사랑하면 착해진다는 말 그거 괜히 있는 말 아니거든"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보가 못된 이유를 어떻게든 정당화했던 염기정의 1화 대사는 뒤늦게 중요한 복선이 됐다. 외사랑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염기정은,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매력을 양껏 뿜어내며 순하고 착한 캐릭터로 변모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반복된 사랑에 찌들고 지치고 익숙해져 그 소중함조차 잃어버린 사람들과 달리, 사랑에 처음 빠졌던 순간처럼 순수한 감정 그대로 날아갈 것 같은 진한 행복에 휩싸여 상대가 애타지 않고 충만하도록 진심 가득한 마음을 꾸밈 없이 건넸다.

사진제공=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이엘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작품에 꾸준하게 누적됐다. 영화 '황해'(2010), '내부자들'(2015) 등 굵직한 작품에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tvN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2016)에서는 삼신할매 역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이기도 했다. 영화 '콜'(2020)에서 신엄마 역으로 전종서 배우와 섬뜩한 연기 합을 맞췄으며,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모럴센스'와 '야차'에 연달아 등장하며 특정 장르나 캐릭터에 갇히지 않는 변화무쌍한 배우로서의 내공을 거듭 입증했다. 물론 그 흐름의 정점은 '나의 해방일지' 염기정이 된 듯싶다. 봄비처럼 느릿하게 스며들었던 것은 비단 염기정뿐만 아니라 배우 이엘 그 자체이기도 했다.

염기정을 향한 시청자의 감정이 '불편함'에서 '연민'으로, 또 '공감'과 '귀엽고 사랑스러움'으로 변화무쌍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박해영 작가의 필력이 만들어낸 잘 여문 대본이 1차적인 몫을 했다. 하지만 해당 대본을 자신의 것처럼, 실제 염기정이라는 인물이 되어 입과 행동으로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직접 뽑아낸 것은 결국 이엘 본인이다. 염기정의 '해방'이 조태훈과의 핑크빛 연애로 이뤄지는 것이 어색하지도 작위적이지도 않도록, 흡사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난 일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역시 이엘 배우의 힘이다. 정작 이엘은 드라마 대본을 받아보고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쓰실 수 있지?"라며 감탄했다지만, 시청자들은 매회 이엘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하지?"라고 감탄하고 있다.

사진제공=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동생들과 마주할 때면 소름 돋게 리얼한 현실 누나, 절친 앞에서는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뱉어내는 솔직한 친구,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끝도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지는 염기정은 이엘의 열연이 빚어낸 산물이다. 비슷한 또래 여성들의 무한한 지지와 공감을 절로 이끌어내는 것 역시, 가공된 인물에게 짙은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엘의 능력이다.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나의 해방일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또 염기정이 사랑을 완성하며 해방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나의 해방일지'가 종영하고 이엘이라는 배우가 어떤 작품에 투입돼 어떤 캐릭터를 소화하든, 일단 믿고 기대하며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엘은 애태우지 않고, 분명 충만하게 해줄테니깐. 우리는 이미 이엘을 추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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