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번역서 과당경쟁 대신 국내 저자에 투자해야

한겨레 2022. 5. 20. 05:07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소설 <파친코> 가 화제다.

높은 시청률에 힘입어 드라마 <파친코> 시즌 2의 제작이 확정되며 출판계에서는 원작 소설의 번역출판권에 대한 관심이 급등했다.

번역도 새로 하기로 하여 독자들은 빨라야 8월 이후에나 새 책을 만날 수 있다.

인기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 (1993년)부터 이번 달에 나온 <행성> 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소설을 꾸준히 한 곳(열린책들)에서만 펴낸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플티브이플러스 드라마 <파친코>의 한 장면. 최근 원작 소설이 국내에서 높은 선인세로 재계약되어 관심을 끌었다. 애플티브이플러스 제공

백원근의 출판풍향계

소설 <파친코>가 화제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이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간 재일 한국인의 가족사를 그린 작품이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되며 전미도서상 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뉴욕타임스>와 <비비시> 방송에서 ‘올해의 책 10’에 선정되는 등 영미권에서 호평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고국과 타국, 개인의 정체성에 관해 묻게 하는 놀라운 소설”이라고 올해의 책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국어판은 문학사상이 2018년에 펴냈다.

영미권의 높은 주목도에 비해 저조하던 국내 번역서의 판매량이 치솟은 것은 올해 3월부터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티브이플러스에서 1천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동명의 오리지널 드라마의 인기가 폭발하며 원작 소설도 주목받았다. 누적 30만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혜성처럼 베스트셀러 최상위권에 오른 이 책은 돌연 판매가 중단되었다. 마침 5년간의 번역서 출판 계약 기간이 끝난 것이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4월13일, 매장 서점에서는 4월21일에 판매가 중단되었다. 이례적인 사건이다.

종전 번역서는 계약 종료로 절판 상태가 되며 현재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구할 수 없다. 이름난 중고 서점에서는 1·2권 합본 가격이 정가(2만9000원)의 3배 이상인 10만원에 거래된다. ‘책테크’(책+재테크)가 가능해진 것이다.

높은 시청률에 힘입어 드라마 <파친코> 시즌 2의 제작이 확정되며 출판계에서는 원작 소설의 번역출판권에 대한 관심이 급등했다. 10여개 출판사의 경합에서 한 출판사가 후속 출판사로 결정되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번역서 선인세는 25억원 정도로 추정된다. 책이 안 팔려도 지불하는 돈이다. 계약 내용은 비밀 준수 의무 때문에 정확한 액수를 알기 어렵지만, 경쟁에서 탈락한 곳들의 입찰 금액을 근거로 한 추정치다. 무라카미 하루키 등 해외 유명 작가의 인기 신작 선인세가 10억원 이상 수준에서 이루어졌던 선례에 비춰보아도 황망한 금액이다. 25억원이면 국내 작가 10명에게 2억5천만원씩 투자해 10편의 대작을 만들 수 있다. 번역도 새로 하기로 하여 독자들은 빨라야 8월 이후에나 새 책을 만날 수 있다. 출판사와 서점은 절호의 판매 기회를 놓쳤다. 베스트셀러가 두루 민폐를 끼친 흔치 않은 사례다.

‘파친코’는 도박이다. 소설 <파친코>를 둘러싼 판권 경쟁도 도박에 가깝다. 판매량에 따라 정해진 저작권료를 사후 정산하면 될 일을, 큰 위험을 무릅쓰며 번역서 시장 전체의 저작권료 인상까지 초래하도록 하는 것은 자승자박이다. 서울 강남의 부동산 가격 급등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듯이, 최고 선인세 계약금의 폭등은 평균적인 번역서 저작권 계약금의 상승을 부를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인기작의 재계약 시점에서 다른 출판사들이 계약금을 올려 계약하는 식의 ‘판돈 경쟁 출판’은 이번 사태로 정점을 찍었을까. 인기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개미>(1993년)부터 이번 달에 나온 <행성>에 이르기까지 수십 편의 소설을 꾸준히 한 곳(열린책들)에서만 펴낸다. 저자와 출판사의 돈독한 신뢰 관계, 그리고 책을 먼저 펴낸 출판사의 선투자가 존중받는 출판문화 정착이 소망스럽다.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