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가해와 피해의 엉킨 타래를 이야기로 풀다

최재봉 2022. 5. 2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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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노벨상 수상자 구르나
소설 세편 한꺼번에 번역출간
아프리카 식민역사에 투영된
개인들의 상처와 화해 그려

바닷가에서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l 문학동네 l 1만6000원

낙원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왕은철 옮김 l 문학동네 l 1만5000원

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l 문학동네 l 1만6000원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 세 편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되었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나는 글쓰기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악랄하게 지배하는 눈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명백하게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긍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Mark Pringle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의 소설 세 편이 한꺼번에 번역 출간되었다. <바닷가에서> <낙원> <그후의 삶>이 그것으로, 구르나는 이 책들의 출간에 맞추어 18일 저녁 한국 언론과 온라인 간담회를 마련했다.

구르나는 지금은 탄자니아의 일부가 된 동아프리카 섬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으나, 탄자니아 수립 과정에서 아랍계 및 이슬람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 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문학 교수로 일하는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장편소설을 10편 출간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고향 잔지바르를 배경으로 삼아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의 유산을 다루고 있다. 18일 간담회에서 구르나는 자신의 문학이 고향 잔지바르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서도 동시에 보편적 호소력 역시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저는 소설에서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주의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소설은 또 아프리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프리카는 수백년에 걸쳐 다른 지역과 만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 소설은 식민주의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동시대적 주제 역시 다루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예순다섯 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망명한 살레 오마르와 그보다 삼십여년 앞서 십대 때 동독을 거쳐 영국에 정착한 라티프 마흐무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모두 3개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1장과 3장은 오마르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2장은 라티프를 화자로 삼았다. 오마르가 라티프의 죽은 아버지 이름으로 된 위조 여권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이어 두 남자와 그 가족들 사이의 가해와 피해가 뒤엉킨 관계가 서서히 풀려 나온다. 특히 3장은 오마르가 라티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를 통해 라티프가 몰랐거나 오해하고 있었던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가 지닌 진실 전달과 치유의 기능을 알게 한다.

3장에서 특히 그러하지만 이 소설 전편에 걸쳐 이야기의 역할과 힘은 거듭 강조된다.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그것은 내 귀에도 근사하게 들렸고”, “나에게는 들려줘야 할 이야기가 있었고”, “그간 알지도 못했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한번 상상해보세요. (…) 사라진 그 이야기들을 다른 누군가가 완성해준다고” 같은 구절들에서 이야기는 자기를 드러내고, 잊히거나 억압된 것을 되살리며, 사태를 아름답고 신뢰할 만하게 채색하는 등 다양한 구실을 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이런 면모는 바로 문학의 그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바닷가에서>의 두 주인공은 성장기에 영어 교육을 받았고 영문학을 비롯한 유럽 문학에 상당한 소양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그렇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로 그의 비타협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그리고 업무에 대한 생각을 집약한 구절이다. 이 말은 낯선 영국 사회에 표착한 두 난민의 각오와 태도 역시 보여주는데, 정작 이들이 접촉하는 백인 영국인들은 이 유명한 표현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책에서는 얽히고설킨 인연의 가시 때문에 적대감을 지니고 다시 만난 두 주인공이 이 표현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적대감을 내려놓고 공감의 감탄과 미소를 교환하는 장면 역시 그려진다.

“살레 오마르가 바틀비의 그 말을 되풀이하는 건 일종의 유희이자 게임과도 같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일종의 문학적 단서를 남기는 것이죠. 오마르나 라티프는 상당한 독서가이기 때문에 문학 작품 속 구절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작가이자 독자이기 때문에, 이런 문학적 인유는 작가로서도 재미있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르나는 <바닷가에서>를 구상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경험들을 알려줬다.

“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 무렵 두 젊은이가 아프가니스탄 국내선 비행기를 납치해서 런던에 도착한 일이 있습니다. 승객은 연령이나 신분이 매우 다양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백발의 남자도 있었죠. 납치 다음 날 많은 승객들이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 노인은 왜 친숙한 조국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택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고향 잔지바르를 다시 방문했을 때 연로한 아버지가 길 건너 모스크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어떤 경험을 겪으며 성장했을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가 그것이 10년 뒤 <낙원> 집필로 이어졌다”고도 밝혔다.

<낙원>은 탄자니아의 해안 마을 출신인 열두살 소년 유수프가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카라반 여행과 모험을 줄기로 삼는다. 유수프가 열일곱살이 될 때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비극적 사랑 이야기이며 동시에 한 세기 전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아름답게 되살려 놓는다. 구르나가 2020년에 발표한 최신작 <그후의 삶> 역시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를 식민 지배하고 있던 20세기 초를 무대로 삼아, 전쟁과 점령의 여파 속에 탈향과 귀향, 사랑과 상처의 생생한 드라마를 엮어 나간다. 문학동네는 이 세 작품에 이어 그가 2005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소설 <배반>(가제) 역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 ⓒ Matilda Rahm

구르나는 간담회에서 “작가로서 나는 남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신념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고, 다만 부정의에 대한 저항을 말하고 묘사하고자 한다”며 “인간은 양면적이다. 문학은 인간의 잔혹성과 불공정, 부당함뿐만 아니라 사랑과 따뜻함 역시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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