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쌀알처럼 단순하고 아름다운 벼농사 이야기

한겨레 2022. 5. 20.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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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그림책 속 어린이

모모모모모

밤코 글·그림 l 그림책향(2019)

오래전 남쪽으로 가을 여행을 갔다가 ‘ 황금 들녘 ’ 한복판을 지난 적이 있다 . 차를 세우고 친구들과 함께 노랗게 부풀어 오른 논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 마침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쨍쨍해 “ 저거 이대로 밥 되는 거 아니야 ?” 하고 실없는 농담을 했다 . ‘ 벼 ’ 라는 낱말을 대하면 이따금 그때가 떠오른다 . 가을 논이 꼭 카스텔라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비유밖에 못 하는 자신을 탓하던 때가 .

< 모모모모모 > 를 읽고 처음 떠오른 생각은 ‘ 도대체 그림책 작가들이란 !’ 하는 것이었다 . 모가 자라 벼가 되고 쌀이 되는 과정을 이렇게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

좋은 그림책들이 다 그렇듯이 이 책도 표지부터 할 얘기가 많다 . 제목만 보아서는 무슨 내용일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데다 형광 분홍색으로 쓰여 있으니 호기심이 생긴다 . 형광 분홍색이란 , 벼농사와는 가장 거리가 먼 색깔 아닌가 ? 예고편 격인 면지의 모 그림을 지나 본문이 시작되면 곧장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 손발이 크고 어깨가 넓은 농부와 모판 다섯개 . 그리고 “ 모 ” 라는 글자 다섯개다 . 모 위의 ‘ 모 ’ 라는 글자가 갑자기 새로워 보인다 . 너무나 모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 다음 장면에서 농부는 땀 흘려 모를 심는다 . “ 내기 내기 내기 ” 다 . 농부와 모가 내기를 하는 것만 같다 .

모가 자랄 때 피도 자란다 . 농부가 피를 뽑을 때 글자는 “ 피 뽑 피 뽑 피 ”. 나는 이 장면이 제일 좋다 . 글자들이 비스듬하게 놓인 것도 재미있지만 , 소리 내어 읽으면 ‘ 삐뽀삐뽀삐 ’ 와 비슷해진다 . 피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도 이 장면을 보면 피가 벼농사를 방해하는 풀이라는 것 , 피를 뽑으려면 구급차가 출동할 때처럼 농부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벼들이 의젓하게 자란 논에는 오리가 지나다닌다 . 그런데 평화도 잠시 , 큰바람이 불어 농부의 모자가 날아가고 오리 가족이 허둥댄다 . 벼들도 쓰러졌다 . 여기에는 어떤 글자가 쓰여 , 아니 그려져 있을까 ? 이 그림책에서는 글자도 그림이라는 점을 참고해서 상상해보기 바란다 .

벼를 튼튼하게 묶을 때 , 벼가 ‘ 황금 들녘 ’ 을 이루었을 때 , 벼를 베고 탈곡해 쌀알을 포대에 담을 때 , 심지어 볏짚 위에서 참새가 놀 때도 각각의 그림에 걸맞은 글자들이 책 읽기를 한층 즐겁게 한다 . 농부의 한 해라는 오래된 소재를 다루는데 뻔한 장면이 하나도 없다 . 어려운 내용도 전혀 없다 . 겉겨를 벗겨낸 하얀 쌀알처럼 단순하고 아름답다 . 이런 그림책은 정말 귀하다 .

이 그림책에서 어린이는 딱 한 번 , 밥을 먹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 그것을 지켜보는 농부의 얼굴에는 아이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어른의 자부심이 가득하다 . 판권에 적힌 ‘ 사용연령 3 세 이상 ’ 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 이 어린 독자들을 만족시키려고 작가는 농부가 그랬듯 애면글면했을 것이다 . 어린이도 정성껏 만든 좋은 것을 알아본다 . 그림책이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

독서교육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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