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하이데거의 '불안'과 불교의 '괴로움'이 만나면..
하이데거·불교 사상 비교 연구
"하이데거, 죽음 이후에 침묵
불교는 괴로움 없는 열반 제시"
불안과 괴로움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초기 불교의 4성제
권순홍 지음 l 길 l 3만3000원
<불안과 괴로움>은 하이데거·불교 철학 연구자인 권순홍 군산대 교수의 신작이다. 지은이는 10여년 전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의 유식 사상을 비교하는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라는 저작을 낸 바 있다. <불안과 괴로움>은 이 전작의 논의를 이어받아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과 초기 불교의 ‘사성제’를 비교한다. 전작이 주로 하이데거 철학과 유식불교의 상통점을 밝히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저작에서는 하이데거 철학과 불교 사상을 맞세워 둘 사이의 같음과 다름을 밝히고 왜 다름이 빚어지는지에 주목한다.
지은이는 하이데거 전기 철학의 열쇠가 되는 말로 ‘불안’을 꼽고, 불교 사성제의 핵심이 되는 말로 ‘괴로움’을 꼽는다. <불안과 괴로움>은 하이데거의 불안과 사성제의 괴로움이 어디에서 만나며 어디에서 갈라지는지를 살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책은 하이데거와 불교 가운데 어느 사상이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더 적실한가 하는 지은이 자신의 근본 관심사에까지 답한다. 이런 답을 찾아가는 길에 하이데거의 지적 선배라 할 니체의 후기 사상도 함께 살핀다. 그리하여 부제가 가리키는 대로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초기 불교의 4성제’에 대한 비교 논의가 이 책의 텍스트를 이룬다.
지은이는 먼저 제1부에서 하이데거 전기 철학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 그중에서도 불안에 관한 논의에 시선을 모은다. 주목할 것은 지은이의 해석이 통상의 하이데거 해석과 사뭇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차이는 <존재와 시간>에서 이야기하는 불안이 ‘잠복한 불안’과 ‘근원적 불안’ 두 가지로 나뉜다고 말하는 데서부터 도드라진다. ‘잠복한 불안’은 인간 현존재의 일상적 실존 바닥에 깔려 나직이 으르렁대는 불안이다. 반면에 ‘근원적 불안’은 인간의 실존을 뒤흔들며 밀어닥치는 불안이다. 이 근원적 불안이 ‘세인’(일상인)의 지배에 사로잡혀 살던 인간을 일깨워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태 앞에 마주 서게 한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미리 겪어봄으로써 인간은 세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을 획득한다.
지은이는 잠복한 불안을 ‘수평적인 저강도 위협’으로, 근원적 불안을 ‘수직적인 고강도 위협’으로 묘사한다. 불안이 잠복해 있을 때 우리는 불안의 은근한 압박에 쫓겨 비본래적 일상에 몰두해 살아가지만, ‘근원적 불안’이 덮치면 그 일상성이 깨져 나가고 우리 삶의 본모습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이 ‘근원적 불안’이 우리를 죽음 앞으로 데려감으로써 본래적 실존으로 깨어나게 한다. 하이데거는 이 ‘근원적 불안’을 비본래적 실존과 본래적 실존을 가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태로 이해한다. 하지만 지은이는 ‘잠복한 불안’이든 ‘근원적 불안’이든 불안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불안은 본래적 실존 양태에서나 비본래적 실존 양태에서나 항상 현존재를 감싼다.” 더 나아가 지은이는 인간 현존재가 근원적 불안을 통해 실존의 본래성을 획득하더라도 불안 자체를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불안 자체를 제거하지 않는 한, 어떤 경우가 됐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초기 불교의 사성제로 눈을 돌린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날 도달한 것이 ‘고성제·집성제·멸성제·도성제’라는 사성제의 진리다. 삶이란 괴로움의 연속인데(‘고’) 이 괴로움이 왜 일어나고(‘집’) 어떻게 사라지는지(‘멸’) 그 길(‘도’)에 관한 가르침이 사성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보면 괴로움은 발생한 원인이 있으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없앨 수 있다. 불교는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로 팔정도 곧 ‘여덟 가지 바른길’을 제시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과 통한다. 그러나 불교가 괴로움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데 반해, 하이데거의 철학은 불안의 소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이데거 철학을 통해서는 불안의 위협을 피할 길이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왜 불안의 위협을 피할 길이 없는가? 하이데거의 철학에 ‘번뇌에 대한 통찰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답한다.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의 실존은 ‘던져져 있음’으로 요약된다. 삶 한가운데 던져진 상태에서 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하이데거는 탄생 이전도 죽음 이후도 논외로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태를 다르게 본다. 삶의 괴로움에는 분명히 삶 이전의 원인이 있고 그 괴로움을 넘어서는 죽음 이후의 목적이 있다. 지은이는 불교의 가르침에 기대어 그 원인을 욕망에 붙들려 사는 ‘갈애’에서 찾고, 그 목적을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열반’에서 찾는다. 우리를 삶의 괴로움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 갈애이니, 이 갈애에서 벗어남으로써 괴로움이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다. “열반은 범부가 세간에서 청정하게 살면서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최종 목적이다.”
그렇다면 왜 하이데거에게는 탄생 이전도 죽음 이후도 사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지은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앞 시대 니체가 그린 역사적 좌표 위에서 사유를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신의 죽음’이 일으킨 허무주의를 출발점으로 삼은 탓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이 봉쇄됐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실존의 불안,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막혀 버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인간은 졸지에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불안의 폐쇄병동에 갇혔다.” 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가? “인간의 죽음 바깥에, 가야 할 목적지로서 열반이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초기 불교의 비교 논의는 이렇게 하이데거의 사유를 기각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지은이가 불교의 사성제를 진리로서 미리 앞에 세워놓고,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을 여기에 맞추어 좁게 해석한 데 따른 것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또 시인 횔덜린과 함께 니체의 니힐리즘을 비판하며 ‘내맡김’과 ‘초연함’으로 나아가는 후기 철학까지 포함해 하이데거 사유 전체를 검토했다면, 불교 사상과 하이데거 사상의 거리는 이 책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더 가까워졌을지 모른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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