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활 경계 흔들려.."재택근무인데 노동강도 더 세지더라"

박태우 2022. 5. 20. 05:0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재택근무]②노동시간·강도증가
일상·생활 공간 분리 안돼
퇴근시간 지나도 쉽게 연락
할 일 있으면 밤늦게 일하기도
게티이미지뱅크.

‘사무실로 출근할 땐 야근을 해도 밤 10시면 끝났는데, 재택근무인데 내가 왜 새벽 1시까지 일하고 있지?’

외국계 리서치회사 직원 박아무개(28)씨는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제 도입을 반겼으나, 기쁨은 잠시였다. 집에서 일하는 날이 늘어날수록 노동시간이 확연히 길어졌고, 전에 없던 깐깐한 근태관리도 신경이 쓰였다. 박씨는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퇴근하면 업무 연락도 끊겨야 하는데, 재택근무를 하니 퇴근시간이 지나도 회사에서 자유롭게 연락을 하더라”며 출근과 퇴근의 경계가 흐려졌다고 했다.

“재택인데 노동강도 증가했다” 2배

재택근무를 하면 출퇴근 시간의 절약으로 일과 생활의 양립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많지만, 일과 생활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노동강도가 오히려 세진다는 경험담도 속출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비대면 시대 일하는 방식의 변화와 일·생활균형’(연구책임자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 보고서를 보면, 재택근무를 경험해본 노동자 3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재택근무 때 업무강도가 ‘감소했다’(19.9%)고 말한 이들보다 ‘증가했다’(39.2%)고 답한 이들이 더 많았다.

노동 시간과 강도의 증가가 꼭 회사의 조직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업무와 생활 공간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환경이 일하는 사람의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건설사 사무직으로 일하는 노아무개(42)씨는 “퇴근길 지하철을 타면 일에서 생활로 ‘모드’ 전환이 됐는데, 집에서는 아무리 일하는 공간을 분리해도 모드 전환이 안 되더라”며 “할 일이 있으면 집에서 저녁까지 먹고도 컴퓨터 앞에 앉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이동통신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손아름(가명·36)씨도 “사무실에서 일하면 점심 먹고 커피 한잔 마시고 쉬다 일하지만, 집에서 일할 땐 나도 모르게 책상에서 밥을 먹게 된다”며 “‘하나만 처리하고 밥 먹어야지’ 하다가 밥시간이 늦을 때도 있고, 밥을 일찍 먹으면 바로 일을 시작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피시 접속시간·화상회의로 ‘노동감시’

반면 기업들은 눈에 안 보이면 ‘쉬는 것’이라는 불안으로 근태관리 명목의 ‘노동감시’를 하기도 한다.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사업체 620곳을 대상으로 재택근무 근태관리 방법을 설문조사했더니, 47.1%가 컴퓨터 접속시간 등을 통해 관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43.7%는 중간관리자가 알아서 메신저 보고 등으로 근태를 확인했다. 아예 화상회의 플랫폼을 온종일 켜놓고 일하게 하는 사례도 있었다. 컨설팅회사에 다니는 송아무개(39)씨는 “재택근무 때 피시(PC)의 마우스를 움직이는지 계속 체크되니 신경이 쓰인다”며 “사무실 근무 할 때도 잠깐 티타임 정도는 용인됐는데, 재택근무 때 오히려 감시가 심해진 느낌”이라고 했다. 리서치회사 직원 박씨는 “상사가 하루에 대여섯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업무 진행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며 “별로 대단한 보고를 한 것도 아니고 순전히 근태관리 목적인데, 집에서 일하면서 화장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 평가 우려도

노동자들에게는 근태관리 못지않게 재택근무 ‘성과관리’에 대한 압박도 부담이다. 서울의 한 미디어콘텐츠 플랫폼 개발업체는 최근 재택근무를 제도화하면서 사무실 규모도 절반으로 줄였다. 이 회사에 다니는 박서훈(가명·42)씨는 “재택근무 제도 자체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리가 잡혀가고 있는데, 인사평가 방법을 두고 고민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엔 사무실에 조금 더 앉아 있는 사람한테 좋은 평가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게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관리자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불만도 생기는 것 같고, 재택근무에서 정성적인 평가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문제”라고 덧붙였다.

결국 눈에 보이는 성과 위주로만 평가가 이뤄진다면 직원들을 과도한 성과경쟁으로 내모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재택근무 제도 도입을 준비 중인 다른 정보기술업체 인사담당자는 “재택이 활성화될수록 자주, 많이, 정교하게 성과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며 “재택근무 체제에서도 관리자와 자주 소통하고 업무 피드백을 주고받으면서 세세한 평가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업무수칙 등 설계 때 노사 협의 필요

재택근무 제도화와 확산을 위해서는 제도 설계와 운영 과정에 노사 간 ‘신뢰’를 바탕으로 양쪽이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재택근무 제도를 도입한 네이버·현대모비스·오늘의집 등 대다수 기업이 공통적으로 내걸고 있는 열쇳말이 ‘신뢰’다. 현대모비스의 경우, 재택근무 도입 과정에서 기본적인 ‘업무수칙’을 노동자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이를 통해 팀원은 재택근무 계획을 협업툴에 사전 등록해 팀장과 팀원에게 공유하기로 했고, 팀장은 협업툴에 업무를 공유하고 평가툴을 통해 상시적으로 성과관리를 진행한다.

정영훈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재택근무자에게 과도한 업무를 부과해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업무 부담의 적정성을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정해진 시간 이외에 연락 금지와 같은 ‘연결차단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며 “재택근무 역시 노동조건에 해당하므로 제도 설계에 노동자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태우 신다은 기자 ehot@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