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신할 완벽한 분신, 그가 나인가? 뮤지컬 '차미' [박병성의 공연한 오후]
편집자주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대중예술은 현실의 문제에서 도피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아픔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행복을 맛보게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기술 문명의 발달은 또 다른 판타지를 제공해 준다. 빅데이터로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이를 디지털 공간에서 살아가게 할 수도 있고, 가상세계에서 현실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가공된 매트릭스라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뮤지컬 '차미'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내가 바라는 가상의 나를 만드는 것이 단순한 환상이 아닌 지금의 시대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현실에서는 연애도, 취업도 하지 못한 자존감 제로인 미호. 타인의 삶을 훔쳐온 사진과 심하게 보정을 한 인물사진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왜곡된 SNS 글과 사진으로 짝사랑하는 오진혁 선배에게 ‘좋아요’를 받게 되자 만들어낸 삶에 대한 동경은 강해져만 간다. 미호의 욕망이 만들어낸 SNS 속의 가짜 자신, 완벽한 차미가 현실에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걷기만 해도 주목받고 자신감 넘치는 차미를 보며 미호는 대리만족을 하지만 점점 본인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면서 세상으로부터 잊혀 간다. 있는 그대로의 미호를 좋아했던 오랜 친구 김고대와 미호가 좋아하는 4차원 킹카 오진혁이 미호의 고민을 더욱 복잡하게 이끈다.
미호는 김고대의 도움으로 부족할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차미에게서 벗어나게 된다. ‘너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러브 유어셀프)’. 예상 가능했던 결론으로 이끌며 현실의 나에게 좀 더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뮤지컬 '차미'는 시의적인 소재를 다루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제시하지만,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충분히 공감되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미호와, 그녀의 현실 속 이상형 차미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차미는 미호의 대리인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착취 관계로 설정된다. 미호의 희생으로 차미는 성공하지만 미호가 누리는 기쁨은 거의 없다. 가상세계의 존재로부터 대리만족을 느껴야 정체성의 문제라든가 갈등이 생기는데 '차미'에서는 이러한 기본 설정이 부실하다. 심지어 차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미호가 사라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전개된다.
메시지는 설득력이 약하지만 대중물로서 작품이 지닌 미덕은 많다. 우선 가상세계라는 시의적인 소재를 흥미로운 판타지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AI) 정치인이 등장하고, 메타버스(3차원 가상세계) 내에서 땅을 사고파는 상황에서 가상의 나와의 갈등을 그린 소재는 매우 흥미롭다.
'차미'의 대중물로서의 또 다른 강점은 뮤지컬답게 캐릭터와 상황을 노래로 잘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현실 속의 평범하고 자존감 없는 미호와, 무슨 일이든 자존감 넘치는 차미의 대비를 뮤지컬 넘버로 훌륭하게 보여준다. 특히 뮤지컬 넘버 ‘스크래치’는 두꺼운 검은 칠로 가려져 있지만 긁어내다 보면 진짜 나만의 매력이 드러날 것이라는 작품의 주제 ‘Love Yourself’를 잘 보여준다.
속물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공주과 차미의 내숭 빠진 캐릭터는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폴더 인사를 하는 후배(미호)의 등을 짚고 가뿐히 넘어 가던 길을 가는 오진혁과, 왠지 모르게 감이 좋고 세상과 비켜 살아가면서도 당당한 김고대 등 개성 강한 조역들도 매력적이다. 만화적인 인물들과 만화적인 상황 연출로 장면장면을 유쾌하게 전개하는 것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뮤지컬 '차미'는 시의적인 소재와 흥미로운 설정으로 창작뮤지컬로서는 처음으로 드라마 판권이 계약되어 드라마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제작진이 만든 창작이니만큼 아쉬운 점들을 보완하여 좀 더 멋진 만남을 기대해 본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플러스씨어터에서 7월 16일까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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