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저는 '수비'입니다

국제신문 2022. 5.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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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센텀시티' 불리는 곳..일제 육군비행장으로 출발, 6·25땐 미군전투기 기지로
1996년 부산시민 품 안겨

오랜만입니다. 저 ‘수비’예요. 모른다고요? 그럼 수비삼거리, 아니면 수비 오거리는 아세요? 수비(水飛)가 바로 수영비행장이란 뜻입니다. 이제 고개를 끄덕이네요. 그럼 이제 제 이야기를 좀 들어봐 주실 거죠?

수비는 옛 경상좌수군통제영(慶尙左水軍統制營)을 낀 수영강 하구의 퇴적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 육군은 전쟁 준비를 위해 이 자리에 ‘해운대’ 비행장을 지었거든요. 5년 후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저는 ‘동부산’ 비행장(전쟁 중에는 K-9)으로 불립니다. 미군이 떠나고 광복이 된 후로는 수비는 별일이 없이 한가한 땅이었어요. 하지만 갑자기 6·25 전쟁이 터지니 저에게 어마어마한 변화가 생깁니다.

전쟁이 터지고 다들 정신 없이 후퇴합니다. 미군은 지원군을 수원비행장으로 보내려 했는데, 하는 수 없이 수비로 보냈고, 수비에 내린 ‘스미스 부대’는 육로로 오산까지 가서 북한군과 첫 교전을 합니다. 하지만 적을 막지 못합니다. 후퇴를 거듭한 미군은 국군과 함께 낙동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치고 필사적인 지연작전을 폅니다. 방어선 안쪽에는 비행장이 세 곳 있었는데 사실상 수비만이 당장 쓸 수 있는 비행장이었답니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거대한 수송기가 수비에 내립니다. 수송기는 증원군과 보급물자를 토해 놓고 부상병을 싣고 다시 활주로를 박차 올랐습니다. 수비가 없었다면 낙동강 전투도 없었을지 모른답니다. 인천 상륙 이후 전선이 북상하자 수송기도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1·4후퇴 후에는 다시 수비가 공중수송의 핵심 비행장이 됩니다.

1951년 5월이 되면 미 공군 폭격기부대도 수비에 주둔해요. 유명한 B-26(인베이더) 폭격기가 여기서 발진합니다. 오래된 사진에서 보셨지요? 폭격기들은 북한 후방 깊숙한 곳으로 날아가 비행장, 군수 시설, 병참선을 공격하는 전략폭격 임무를 수행합니다. 덕분에 중국 공군의 항공력은 만주에 발이 묶입니다. 나중에는 유명한 ‘철의 삼각지’ 전투에도 지상군을 근접 지원하는 전술폭격 작전도 수비에서 이륙한 폭격기들이 해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전폭기 부대가 수비에 왔어요. 1950년 12월부터 미 공군의 요격전투기와 전투폭격기들이 수비에서 발진합니다. 프로펠러가 달린 F-51(머스탱)과 F-82(트윈머스탱), 제트 엔진을 달고 쌔액~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쌕쌕이’ F-80(슈팅스타), F-86(세이버), F-94(스타파이어)가 수비에서 뜨고 내립니다. 미 해병대의 전투기들도 수비에서 프로펠러기인 F4U(코르세어)와 ‘쌕쌕이’ F9F(팬더)를 띄웠어요. 전 세계에서 가장 성능 좋은 군용기들의 모 기지가 바로 수비였답니다.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국제선 민항기까지 취항한답니다. 당연한 것이 저는 대한민국 전시수도의 어엿한 항공 관문이었으니까요. 1952년에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인이 수비에 내려 부산을 방문했지요. 이즈음이 저 수비에겐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하지만 휴전되고 전시수도가 서울로 되돌아가면서 수비의 중요성도 줄어요. 1954년 10월에는 폭격기부대도 일본으로 돌아가고, 1956년에는 수비의 관할권이 우리 정부로 넘어옵니다. 1958년에는 수영비행장이 부산비행장을 거쳐 부산수영공항으로 문을 엽니다. 1963년에는 부산국제공항으로 새 단장해요. 수비가 이제 어엿한 국제 항공 관문으로 자란 거죠. 그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1976년 김해국제공항이 문을 열면서 민간 항공 기능을 김해로 이전합니다. 저는 다시 ‘수비’가 됩니다.

돌아온 수비를 바라보는 부산시민의 시선은 곱지 않았어요. 특히 여름에 해운대 가는 만원버스를 탄 승객들은 수영교를 건너면서 버스가 신나게 달리기 시작할 무렵 수비 때문에 우회전을 하는 통에 몸이 많이 떠밀리곤 했어요. 사람들은 ‘이게 다 수비 때문’이라고 불평했죠. 할 일이 없어진 수비는 컨테이너나 쌓아 두는 곳(CY)이 됐다가 베트남 전재민 수용소로도 쓰입니다. 저는 1996년에 철조망을 허물고 부산시민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일본군과 미군, 국방부의 손을 거쳐 56년 만의 귀향이었어요. 물론 이후의 일은 잘 아시죠?


지금 저는 ‘센텀시티’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려요. 하지만 종종 수영강을 산책하는 분들이 저기가 옛날 수비가 있던 곳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저는 가슴이 뛰어요. 그리고 어느 버스 노선표의 ‘수비오거리’도 무척 반가워요. 아직 부산사람들이 수비를 잊지 않았다는 말이니까요. 이 근처를 지나면 전쟁 중에 우리나라를 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던 저, 수비를 한 번씩 떠올려 주실 거죠? 그리고 나지막이 수비야 잘 있었니? 하고 안부를 물어봐 주시면 얼마나 고마울까요? 곧 6월도 오잖아요. 저는 변함없이 제 곁을 지켜주는 수영강과 함께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답니다.

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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