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20) '이별의 부산정거장'서 피어난 '유라시아 플랫폼'의 꿈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입력 2022. 5. 20. 03:00 수정 2022. 6. 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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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부산역의 1971년과 2022년(오른쪽) 모습. 셀수스협동조합 제공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남인수가 부른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잣집이여”라는 노랫말로 시작한다. 전쟁으로 부산에 피란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부산역에서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이다. 경부선 철도의 종착역인 부산역은 이렇게 한국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다.

경부선 철도는 1905년 남대문~초량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08년 부산역이 임시정거장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1910년에는 당시 유명한 일본 건축가인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한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역사가 건립되었다. 다쓰노 긴고는 일본 도쿄역과 서울의 한국은행 본관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런데 1910년부터 사용한 부산역은 현재의 위치가 아닌 중앙동에 있었다. 부산을 대륙 진출의 출발점으로 삼은 일제는 시모노세키에서 부관연락선을 타고 건너온 일본인들이 바로 기차로 갈아타고 서울은 물론 만주, 중국 등으로 갈 수 있도록 부산항 제1부두에 인접한 곳에 역을 만들었다. 당시 관광안내서는 부산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만주의 창춘(長春)까지 35시간, 모스크바까지 9일, 파리까지 11일에 갈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렇게 한반도 철도는 철저하게 일제의 관점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하행,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것을 상행이라 불렀다.

일제가 지은 중앙동의 부산역은 1953년 이 일대를 휩쓴 대화재로 전소되었다. 부산역은 임시 역사로 운영되다가 현재의 위치인 초량동에 역사를 신축하고, 1969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1971년 사진의 건물이 새로 만들어진 부산역이다. 5층 콘크리트 건물로, 사진 왼쪽에 살짝 보이는 3층 승객 출구와 역광장을 바로 연결하는 넓은 통로가 특징이었다. 현재의 사진은 2004년 고속철도 개통에 맞추어 증개축된 역사의 모습으로 유리 궁전을 연상케 한다. 분수대가 있던 역광장에는 ‘부산 유라시아 플랫폼’이 만들어졌다. 남북이 통일되어 부산역이 유라시아 횡단철도의 시발역이 될 날을 기대해 본다.

* 이 칼럼에 게재된 신문의 사진은 셀수스협동조합 사이트(www.celsus.org)에서 다운로드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해도 됩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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