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 '장수의 길' 열어주고파 코트서 후회 없이 '마지막 춤을'
[경향신문]
플레잉코치로 지낸 지도 8년째
어느새 두 바퀴 띠동갑과 ‘한솥밥’
‘제2 여오현’ 박경민의 등장 뿌듯
올 시즌까지 뛰고 은퇴하기로 결심
“바닥 찍었으니 올라갈 일만 남아”
10번째 우승 목표, 해피엔딩 예고
두 바퀴 돌아 띠동갑인 후배 선수와 한 팀에서 뛴다. 고등학생이던 팬이 어느새 엄마가 되어 딸과 손잡고 배구장을 찾아온다. 노장 소리를 들은 지도 수년, 선수와 코치를 겸하는 플레잉코치로 지낸 지도 8년째다. “내가 배구를 이렇게까지 오래했나?” 새삼 놀랄 때가 많다.
‘살아있는 전설’ 리베로 여오현(44·현대캐피탈)은 배구에 입문한 지 36년째, 실업배구·프로배구를 합친 경력은 22년째에 접어들었다. 다가오는 2022~2023시즌까지 코트를 누비고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여오현은 “선수로서 마무리를 잘하고 싶다. 후배들도 나처럼 오래 뛸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오현은 국내 4대 프로스포츠(배구·농구·축구·야구) 현역 선수 가운데 최연장자이자 V리그 역대 최고령 선수다. 올해 5번째 FA 계약을 맺고 선수생활을 1년 더 연장했다. 2016~2017시즌을 앞두고 최태웅 현대캐피탈 감독과 구단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시작한 ‘45세 프로젝트’의 완성을 앞둔 셈이다. 배구를 향한 끈기와 열정이 여기까지 이끌었다. “배구는 제 인생의 전부죠. 열 살부터 배구를 했는데, 살면서 ‘배구’라는 단어를 ‘엄마’보다 더 많이 말한 것 같아요(웃음).”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이끌려 갓 창단한 배구부에 발을 들였다. 레프트 공격수를 맡았지만 배구선수로서는 작은 키가 늘 발목을 잡았다. 175㎝의 여오현은 홍익대 배구부에 들어가서도 별다른 희망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이던 1998년 도입된 리베로 제도가 운명을 바꿔놨다. 수비만 전문으로 하는 리베로는 그에게 딱 맞는 옷이었다. 여오현은 “인생의 첫번째 터닝포인트”라고 회상했다.
2001년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고 실업무대에 발을 들였고, 2005년 V리그 출범 이후에도 줄곧 남자배구 ‘슈퍼땅콩’으로 활약했다. 17번의 챔피언결정전에 14번 참가하고 9차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7시즌 동안 575경기에 나가 리시브 정확 7708개, 디그 성공 5127개를 기록했다. 두 부문 모두 통산 1위다. 역사를 써내려간 비결은 거창하지 않았다. 여오현은 “큰 부상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왔다”며 “오래 선수생활을 하려면 언제 어떻게 다칠지 모르기 때문에 웨이트트레이닝 등 몸 관리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무대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월드 리베로’로 통했다. 두 차례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 번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오현은 2024 파리 올림픽 출전권 확보를 목표로 오는 7월 국제배구연맹(FIVB) 챌린지컵에 참가하는 후배들에게 “파워 면에서는 아시아권 선수들이 밀리고 있긴 하지만 계속 부딪쳐봐야 배우는 게 있을 것”이라며 “한 단계씩 올라서다보면 한국배구, 남자배구가 더욱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한다. 힘들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2의 여오현’의 존재는 그를 흐뭇하게 만든다. 같은 팀 소속으로 주전 자리를 굳힌 리베로 박경민(23)이다. 챌린지컵 국가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여오현은 “그 나이 때의 나보다 더 뛰어난 선수”라며 “앞으로 무궁하게 발전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리베로가 계속 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지난 시즌 창단 후 처음으로 최하위(7위)를 기록한 현대캐피탈은 다음달 1일 새 시즌을 위한 훈련에 들어간다. 휴가기간인 지금은 고교 배구선수인 첫째를 비롯한 두 아들을 챙기는 아빠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체력관리를 위한 운동도 빼놓지 않는다. 코트에서 뛰는 시간이 잠깐일지언정,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을 후회 없이 보내고 싶다. 팀이 반등에 성공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이후에는 지도자로서 배구와의 인연을 이어갈 생각이다.
“선수라면 우승을 열번, 백번 했어도 또 우승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우리 선수들 모두 벼르고 있을 겁니다. 바닥을 찍었으니 치고 올라 갈 일만 남았죠.”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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