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특공대'처럼 뭉친 집단지성, 블랙홀 관측에 성공하다[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29)
[경향신문]
오래전부터 블랙홀로 추정된 우리 은하 중심부 천체 ‘궁수자리 A*’
간접 증명 아닌 ‘직접 관측’ 위해선 초고성능 전파망원경 필요
각국 과학자들, 네트워크 EHT 구축, ‘지구 크기’의 망원경 성능 구현
지난 5월12일 언론에 공개된 ‘도넛 사진’ 하나가 전 세계 과학자들을 열광시켰다. 이 사진은 밝은 빛의 고리가 어두운 구멍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우리 은하(은하수 은하) 중심부의 궁수자리 A*라는 천체의 영상이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 꼭 도넛을 닮았다. 과학자들은 왜 이 사진에 열광하고 전 세계 수많은 언론이 대서특필했을까?
궁수자리 A*는 오래전부터 블랙홀로 믿어 의심치 않은 천체였다. 블랙홀이란 공간의 좁은 영역에 질량이 집중돼 주변의 중력이 아주 강력한 천체이다. 블랙홀에는 가상의 구면이 있어 이 경계를 넘어서면 빛을 포함해 그 어떤 것도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이 경계면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 부른다.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천체라는 개념은 뉴턴역학의 틀 속에서 18세기에 이미 영국 존 미셸이나 프랑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등의 과학자들이 제시했다. 지구 표면의 어떤 물체가 지구 중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임의로 먼 곳까지 날아가려면 초속으로 약 11.2㎞의 속력이 필요하다. 이를 탈출속력이라 한다. 만약 탈출속력이 광속보다 더 커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빛조차도 그 천체로부터 벗어나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 결과 그 천체는 멀리서 봤을 때 어둡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천체를 어둑별(dark star)이라 불렀다.
블랙홀은 말하자면 현대화된 어둑별로서, 현대화된 중력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중력의 본질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이해한다. 질량이 있는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이유는 질량이 있는 물체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지게 되고, 주변의 다른 물체들은 그렇게 휘어진 시공간의 최단경로를 따라 운동하기 때문이다. 아주 무거운 천체가 좁은 공간에 집중돼 있으면 그 주변의 시공간이 급격하게 휘어져 빛을 포함한 그 어떤 물체도 천체에서 더 멀어질 수 없는 경계면, 즉 사건의 지평선이 존재하게 된다. 이런 천체가 블랙홀이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구면의 반지름을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라 한다.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은 천체의 질량에 정비례한다. 따라서 블랙홀의 질량이 커지면 그 사건의 지평선도 커진다.
블랙홀에서는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므로 통상적인 방법으로 블랙홀을 관측하기는 어렵다. 다만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 때문에 주변의 물질들이 블랙홀 주변을 맴돌거나 빨려 들어갈 때 강한 X선을 방출하는 경우가 있다. 백조자리 X-1은 X선을 방출하는 원천으로서 처음으로 블랙홀로 지목된 천체였다. 블랙홀의 존재를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은 주변 다른 천체들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궁수자리 A*의 경우 라디오파의 근원으로 관측된 이래 그 주변을 공전하는 수십개의 별을 관측해 그 질량과 크기를 추정할 수 있었다. 천체의 질량이 주어지면 그로부터 곧바로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이 결정되고, 만약 그 천체의 크기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을 넘지 않는다면 그 천체는 블랙홀일 것이다. 궁수자리 A*의 질량은 태양 질량의 약 400만배인 초대질량 블랙홀이다. 궁수자리 A*를 20년 이상 관측하며 이런 사실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라인하르트 겐첼과 앤드리아 게즈는 2020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각각 4분의 1)했다.
과학자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간접적인 방법 말고 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블랙홀을 ‘관측’할 수 있는 수단을 추구해왔다.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을 ‘관측’한다는 것은 사실 ‘둥근 네모’만큼이나 모순적이다. 똑똑한 과학자들은 기막힌 방안을 결국 찾아냈다. 바로 블랙홀의 ‘그림자’를 찍는 것이다! 블랙홀 자체는 빛을 내거나 반사하지 않지만 그 근처에 밝은 빛이 있으면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이 주변의 시공간을 휘어 마치 렌즈처럼 빛이 블랙홀 주변을 휘감게 해서 이를 배경으로 블랙홀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즉, 한가운데는 검고 주변은 고리 모양의 빛이 둘러싼 도넛 모양을 기대할 수 있다. 실제 궁수자리 A*의 경우에는 보통의 가시광선 빛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파장이 긴 1.3㎜ 파장의 전자기파를 관측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능이 좋은 전파망원경이 필요하다.
문제는 블랙홀의 그림자를 똑똑하게 관측하기 위해서는 전파망원경의 분해능이 대단히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전파망원경의 크기가 클수록 유리한데, 블랙홀의 그림자를 관측할 수 있는 분해능이 나오려면 지구 크기의 전파망원경이 필요하다. 지구 크기의 전파망원경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영리한 과학자들은 이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전파망원경 여러 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가상 전파망원경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는 지구 크기 전파망원경의 성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사건지평선망원경(Event Horizon Telescope·EHT)’이다. 그 이름은 물론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에서 따온 것이다. EHT는 지구상 8개의 전파망원경으로 구성된다. EHT의 분해능은 약 100만분의 25각도초(25마이크로각도초)로서 지구에서 달 표면의 귤 정도 크기, 또는 파리에서 뉴욕에 있는 카페의 신문 글자 정도 크기를 식별할 수 있다. EHT에는 현재 전 세계 80여개 연구기관에서 3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소속돼 있으며 한국 연구진도 포함돼 있다.
EHT는 2017년부터 우리 은하 중심부의 궁수자리 A*와 그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은하 M87의 초대질량 블랙홀인 M87*를 관측했다. 지구에서 궁수자리 A*까지의 거리는 약 2만7000광년, M87*까지의 거리는 약 5500만광년이다. M87*는 지구에서 훨씬 더 멀리 있는 대신 그 질량은 태양 질량의 약 65억배에 달하는 초대형 블랙홀이다. 이들의 그림자 크기는 약 52마이크로각도초(궁수자리 A*)와 42마이크로각도초(M87*)로 비교적 큰 편이라 EHT로 충분히 관측할 수 있다.
처음 결과가 나온 것은 M87*의 그림자를 찍은 영상으로, 2019년 4월에 발표되었다. M87*의 영상에서도 선명한 도넛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
한가운데가 검고 주변이 밝은 빛의 고리인 도넛 모양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블랙홀의 그림자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도넛 모양에 열광한 것이다. M87*는 인류가 최초로 직접 관측한 블랙홀의 모습(그림자)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인류 최초 블랙홀 M87* 이어 올해 궁수자리 A* 그림자도 촬영
21세기 과학은 초협력 시대…성과는 ‘소통·융합’에 달렸다
M87*는 지구에서 아주 멀리 있는 은하 중심부의 블랙홀인 반면 궁수자리 A*는 바로 우리 은하 중심부의 블랙홀이어서 궁수자리 A*의 그림자를 직접 관측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지구에서 훨씬 더 가까운 궁수자리 A*를 관측하기가 쉬울 듯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여서 기술적으로 더 어렵다. M87*나 궁수자리 A* 주변의 기체들은 모두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비슷하게 움직이지만 각 블랙홀의 크기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지구에서 관측하는 난이도가 달라진다. M87*의 경우 주변 기체가 블랙홀을 한 바퀴 공전하는 데 며칠에서 몇 주가 걸리지만 궁수자리 A*는 그 공전주기가 겨우 30분 이내인 경우도 있다. 그 결과 블랙홀 주변의 밝기 패턴이 너무 빨리 바뀐다. 이번에 공개된 궁수자리 A*의 영상은 2017년 관측한 수천장의 다른 영상들을 평균해서 얻은 것이다.
궁수자리 A* 영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결과는 역시나 도넛 모양이다. 이는 궁수자리 A*가 정말로 우리 은하 중심부에 위치한 초대질량 블랙홀이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즉, 우리 은하의 중심부에 정말로 엄청난 질량의 블랙홀이 있음을 실제 ‘관측’한 셈이다. 이 모양은 3년 전에 발표한 M87*의 영상과도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다. 궁수자리 A*가 M87*보다 2000배 더 가깝고 1500배 더 가벼움에도 두 도넛의 모양과 크기가 비슷하다는 것은 이 결과가 크기와 상관없이 블랙홀의 보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블랙홀을 설명하는 중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두 블랙홀 그림자의 차이점을 면밀하게 분석해 블랙홀의 성질을 보다 상세하게 파헤칠 수 있다. 이처럼 전혀 다른 환경에 있는 두 개의 블랙홀 그림자 영상을 확보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21세기 과학의 혁혁한 전과라 평가할 수 있다.
EHT의 성공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무엇보다, 21세기 과학의 프런티어를 전 지구적 규모의 초협력을 통한 빅사이언스로 개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진의 숫자가 300명을 넘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8개의 전파망원경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전대미문의 관측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21세기에는 인간 지성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해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물적 자산이 어디까지이고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글로벌 협력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창의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소통과 조화, 융합의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옆에 있는 친구보다 1점이라도 더 받아야 살아남는 한국의 풍토와는 사뭇 다르다. ‘오징어 게임’ 같은 경쟁으로 남을 짓밟고 나 혼자만 살아남는 방식으로는 세계를 선도할 수 없다. 우리도 이제는 빅사이언스를 통해 초협력의 리더십을 키워야 하고 어린 세대에게 다 같이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21세기의 생존규칙이다.
■ 참고문헌
-The Event Horizon Telescope Collaboration et al. 2022 ApJL 930 L12.
-The Event Horizon Telescope Collaboration et al. 2019 ApJL 875 L1.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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