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물가에 "환율 하락, 오히려 좋아" 기묘한 환율 이야기

곽창렬 기자 2022. 5. 1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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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그래픽= 김의균

충남에서 알루미늄 제조업체 ‘중앙알텍’을 운영하는 김성진 대표는 요즘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이 회사는 조달청으로부터 알루미늄 원재료인 인고트를 사들이는데, 2020년 4월만 해도 톤당 193만원이던 인고트 가격이 올해 4월 427만원으로 두 배 넘게 올랐다. 최근 원자재 값이 뛴 데다 환율이 2년 전보다 100원 가까이 오르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이다. 김 대표는 “원료의 60%를 수입하다 보니 작년 회사 이익이 재작년보다 5억원 줄었다”며 “환율이 오르면 수출하는 대기업은 웃을지 몰라도,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라고 했다. 일부 업체는 조달청에 직접 찾아가 “제발 가격을 내려달라”고 읍소하고 있다. 충청호남알루미늄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품질에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닌데 환율 때문에 같은 물건을 두 배 넘게 주고 사야 하다 보니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전 세계가 수입물가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고통에 신음하면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 간에 이전에는 보기 드문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자국 통화가치를 높이고 환율을 끌어내리는 이른바 역(逆)환율전쟁(reverse currency war)이다. 지금까지 대부분 국가는 통화 가치가 낮아야 수출과 무역 흑자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가급적 환율을 높게 유지하려고 노력해왔고, 이 과정에서 종종 국가 간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인 1985년 플라자 합의, 환율 조작국 지정을 둘러싸고 지난 몇 년간 이어진 미·중 갈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인플레이션이 발등에 불로 떨어진 데다 ‘고환율=수출 증가’ 공식도 약화되면서 최근에는 각국이 오히려 통화 약세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조지 콜 골드만삭스 유럽금리전략 책임자는 “각국이 더 이상 통화 강세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치부하지 않게 된 것은 큰 변화”라며 “이번 긴축 사이클 동안 G10(주요 10국) 중앙은행이 강한 통화를 친근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붙은 역환율 전쟁

각국이 통화 가치를 높이기 위해 꺼내든 가장 기본적인 수단은 기준금리 인상이다. 미국이 이달 초 22년 만에 빅 스텝(0.5%포인트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것에 발맞춰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숨 가쁘게 기준금리를 인상 중이다. 콜롬비아(5%→6%), 아이슬란드(2.75%→3.75%), 브라질(11.75%→12.75%), 영국(0.75%→1%), 루마니아(3%→3.75%), 칠레(7%→8.25%), 호주(0.15%→0.25%) 등 이달 들어서만 13일 현재 20국이 기준금리를 올렸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인상한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물가 상승 등을 감안할 때 향후 빅 스텝을 배제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해 하반기에도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환율을 끌어내리기 위해 각국 외환 당국은 보유 중인 달러화도 아낌없이 시장에 내다 팔고 있다. 정치 권력의 과도한 개입으로 통화 가치가 급락한 터키의 경우 지난해 말 외환시장 개입을 공식 선언한 뒤 1억달러 넘는 달러를 공개 매도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경제나 환율 상황이 양호한 축에 속하는 대만도 통화 가치가 추가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최근 외환시장 개입에 나섰다. 1달러당 대만 달러화 가격은 2월 말 27.99달러에서 최근 29.84달러까지 올랐다. 달러화를 매도하면서 30달러 선 돌파는 막았지만, 그 대가로 4월 말 현재 대만의 외환보유액은 전달보다 37억1000만달러 감소했다. 차이치웅민 대만 중앙은행 외환국장은 “미 달러화 가치가 주요국 통화 대비 절상되는 상황에서 대만 통화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두 달 연속 달러화를 매도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환율 방어를 위해 달러를 내다 팔면서 대부분 국가의 외환보유액은 감소하고 있다. 한국도 4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이 4494억달러를 기록, 한 달 전보다 85억1000만달러 감소했다. 원·달러 환율이 1300원을 넘어설 조짐을 보이자 외환 당국은 이례적으로 올해 두 차례 공식 구두 개입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한 번도 없던 일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우리나라도 전 세계 상황과 비슷한 흐름에 있고, 그에 발맞춰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물가 잡는 덴 통화 강세가 즉효약

각국이 경쟁적으로 환율 가치 방어에 나선 것은 전 세계에 불어닥친 물가 상승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국의 대규모 코로나 방역 봉쇄 이후 전 세계 물가는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 중이다. 미국은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전년보다 8.3% 올랐고, 유로존 물가도 지난달 7.5% 올라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성장보다 물가 잡기가 중요해지면서 환율 하락이 해결책으로 떠오른 것이다. 통화 가치를 높이면 수입품 가격이 내려가기 때문에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있다. 또 수입 원자재를 들여와 생산하는 제품의 가격을 낮추는 데도 효과가 있다.

스위스는 통화 강세로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데 톡톡히 효과를 봤다. 지난달 스위스의 물가 상승률은 2.5%로, 유로존 물가 상승률(7.5%)을 크게 밑돌았다. 달러화 대비 스위스프랑 환율은 2020년부터 최근까지 달러당 1.1프랑 안팎을 유지해왔다. 토머스 조던 스위스 중앙은행 총재는 “스위스프랑화의 강세가 수년간 경제에 충격을 줬지만, 인플레이션을 피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이런 효과 때문에 전통적으로 달러화 강세를 기피해 왔던 미국도 최근의 달러화 강세는 용인 또는 조장하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재임 기간 미국 정부는 유럽·중국 등을 향해 환율을 조작(자국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 상대적으로 달러화 강세를 유도)한다고 으름장을 놨고, 실제로 중국과 스위스, 베트남 등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근에는 달러화 강세에 별다른 불만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최근 1년간 달러 인덱스(주요 6국 통화 대비 미 달러화 가치)는 16%나 올랐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올해 2분기 미국 달러 값이 10% 오르면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올해 3~4분기에 약 0.4%포인트 하락할 것으로 추산했다.

◇'고환율은 좋은 것’ 공식 약해져

환율은 자국 통화와 외국 통화 간의 교환 비율이다. 1달러를 받기 위해 우리나라 원화를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다. 이 때문에 ‘달러 값’이라 불리기도 한다. 환율은 외환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

환율 변화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수백 가지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양하다. 한국은행은 가장 근본 요인으로 한 국가와 상대국의 물가수준 변동을 꼽는다. 예를 들어 사과 하나를 미국에서는 1달러로 살 수 있고, 한국에서는 1280원을 주고 살 수 있다면 1달러는 우리 돈 1280원과 같다. 이에 따라 환율은 달러당 1280원으로 결정된다. 만약 미국에서는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나라 사과값이 2500원이 오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1달러는 2500원으로 가치가 올라간다. 물가 변화에 따라 구매력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이로 인해 환율이 결정되는 것이다.

장기적 변동 요인으로는 생산성 변화가 꼽힌다. 물건을 생산하는 능력이 향상되면 적은 비용으로도 물건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물건값이 떨어지면서, 환율이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이 기술을 개발해 사과를 생산하는 능력이 2배로 향상되면, 비용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 경우 미국 사과 값은 1달러에서 0.5달러로 떨어진다. 한국 사과값(1280원)은 0.5달러와 맞먹게 되면서 환율이 2배로 오르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국제수지(일정 기간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서 이루어진 경제적 거래)로 인해 환율이 출렁거린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많은 제품을 수출해 흑자를 기록하면, 국내로 들어오는 미국 달러가 많아진다. 이 경우 달러 가치는 떨어지고, 원화 가치는 올라 환율은 하락한다. 반대로 수입이 증가해 국제수지가 적자를 기록하면,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달러 가치는 오른다. 이로 인해 원화 가치는 내려가면서 환율은 상승하게 된다.

환율이 상승하거나 하락할 때마다 내부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요즘처럼 환율이 상승할 때 대표적인 승자는 자동차·조선·가전 같은 수출 업종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1분기 국내와 해외를 합쳐 약 100만대의 차를 팔았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9만7000여 대(9.7%) 적은 90만3000여 대를 팔았다. 그런데 매출액은 작년보다 10.6% 증가한 30조2986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도 작년 1분기보다 16.4%(5510억원) 늘었다. 이에 대해 현대차는 “올해 1분기 원·달러 평균 환율이 작년보다 8.2% 상승한 1205원을 기록했는데, 환율 효과가 전체 물량 감소의 영향을 상쇄하면서 매출액이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원화 가치가 10% 하락할 경우 기계·장비(3.5%p), 컴퓨터·전자·광학기기(2.5%p), 운송장비(3.5%p) 업종에서 특히 영업이익률이 많이 상승한다.

반면 에너지나 광물, 농산물 등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하는 업종은 환율이 오르면 피해를 본다. 달러화로 표시되는 원자재 가격이 변함없더라도 환율 상승으로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같은 물건을 사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9년 환율이 올라 원화 가치가 10% 떨어졌을 때 수입 원재료값이 오른 탓에 전체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2.1%포인트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석탄·석유(-2.4%포인트), 음식료(-0.6%포인트), 목재·종이·인쇄(-0.4%포인트), 금속(-0.2%포인트) 등의 손해가 컸다.

이 때문에 환율의 상승 또는 하락이 국민 전체에 이익인지 혹은 손해인지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 국가는 환율 상승으로 얻어가는 이익에 더 높은 점수를 줬다. 수출 경쟁력 강화와 무역수지 개선, 이를 통한 경기 부양이 더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서로 통화 가치를 낮추기 위해 경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예를 들어 200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 등이 글로벌 금융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러와 유로 가치를 떨어뜨리자 브라질 등 신흥국 통화는 달러 대비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기두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선진국들이 환율전쟁을 펼치고 있다”며 공개 비난했다.

하지만 ‘고환율이 수출을 늘려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공식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환율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과거보다 작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발표한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흑자 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상수지 흑자에서 환율을 비롯한 금융 요인이 기여하는 정도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GDP 대비 2%에 육박했지만, 2010년 이후에는 거의 0%에 가깝다. 김민식 한국은행 국제무역팀장은 “과거에는 가격경쟁력이 수출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갈수록 제품의 품질 등 가격 외 요소를 더 중시하다 보니 환율이 과거만큼 무역에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기록적인 엔화 약세로 20년 만에 달러당 130엔 선이 무너진 일본에서도 “엔화 약세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철강연맹 회장인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사장은 “일본 제조업 역사상 처음으로 ‘엔저 리스크’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코로나 기간 급증한 국가채무도 환율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했다. 미국 자산운용사 야누스 핸더슨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 정부 지출 증가, 금리 인상에 따른 이자 부담 증가 등으로 올해 전 세계 국가채무는 지난해보다 9.5% 증가한 71조6000억달러(약 9경1111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국가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통화 가치가 하락하면 부채 상환 부담은 더욱 늘어난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달러를 팔고 금리를 올려 환율을 끌어내리려 애쓰는 진풍경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런 역환율 전쟁이 뉴 노멀이 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건영 신한은행 투자상품서비스본부 부부장은 “대부분 신흥국은 수출로 먹고살아야 하는데, 오랜 기간 통화 가치를 띄워 놓고는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세대 경제대학원 배선영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심할 경우 일시적으로 통화 강세를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 같은 나라는 통화 가치를 낮춰 계속 외환보유액을 쌓는 방향으로 나가는 게 맞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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