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초대석]5.18기념재단LA 정성업 대표..'LA 헌혈투쟁'을 아시나요

김재현 2022. 5. 1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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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5.18 민주화운동 제 42주년이었는데 한국과 16시간 시차가 있는 미국 LA는 LA현지시간으로 18일 수요일 오후 5시 30분 우리 시간으로 오늘(19일) 오전 5.18 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을 열었다고 합니다.

기념식을 주최한 5.18 기념재단 LA 정성업 상임대표 줌으로 화상 연결돼 있습니다.

△앵커: 5.18 기념재단이 LA에도 있네요.

△앵커: 5.18 당시 현지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 현지의 반향 같은 게 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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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5.18 민주화운동 제 42주년이었는데 한국과 16시간 시차가 있는 미국 LA는 LA현지시간으로 18일 수요일 오후 5시 30분 우리 시간으로 오늘(19일) 오전 5.18 민주화운동 42주년 기념식을 열었다고 합니다. 기념식을 주최한 5.18 기념재단 LA 정성업 상임대표 줌으로 화상 연결돼 있습니다.

△앵커: 정 대표님 나와 계신가요?

▲정성업: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앵커: 이렇게 화면으로 인사드려서 좀 민망한데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성업: 예.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앵커: 5.18 기념재단이 LA에도 있네요.

▲정성업: 5.18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마찬가지로 광주의 소식을 들은 LA의 우리 교포들이 함께 궐기했던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국과 마찬가지로 5.18 기념재단 LA라고 하는 상설기구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앵커: 5.18 민주화운동 제42주년 기념식을 LA에서 여셨는데 제가 5.18 기념식 초청 LA 현지 한국 신문 광고 보니까 '42년 전 5월 그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불의한 국가 권력에 맞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항거한 민주 열사들을 추모하고'라는 문구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기념식이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정성업: 저희가 예전에는 분향소를 설치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희가 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고 이번의 특징은 두 분의 강사를 모시고, 그 때 당시 현장의 증인을 세워서 생생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 우리가 이번에 진행했습니다.

△앵커: 두 분의 강사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어떤 분이신가요?

▲정성업: 한 분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봉사활동을 나갔던 폴 코트라이트 박사이신데 나주 남평에 있는 한센 환자들을 돌보는 그런 역할을 하시다 광주에 가셔서 이 사건을 목도하고 이것을 해외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미 대사관에서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구하고자 4명의 청년들이 그 때 당시에 외국 기자들을 통역을 맡으면서 광주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했고 기록의 근거로 해서 오늘 강연을 하셨고요. 또 한 분은 한국의 청년으로서 미국에 유학을 오셨는데 소식을 듣고 대학생들이 함께 일어나서 궐기해서 그 때 당시에 릴레이에 항쟁을 주도했던 분이십니다. 합산 범시민단체연합의 상임대표이십니다. 두 분을 증언자로 세워서 이번에 강연을 들었습니다.

△앵커: 폴 코트라이트 박사면 지난 2020년 5.18 40주년에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회고록을 내신 분 아닌가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마/

▲정성업: 예 맞습니다. 바로 그분이십니다.

△앵커: 오늘 강연자로 모셨다고 하는데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정성업: 볼코트라이트 박사는 이 분이 굉장히 안타까워하는 것은요. 사실이 사실대로 보도되지 않고 보도되는 일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 그다음에 전두환과 그 세력들이 사과하지 않았다는 것, 미국의 당시 정부가 대한 정책을 잘못 써서 그것을 용인했다는 것, 그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매우 컸었고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그 때 당시에 항쟁의 모습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항쟁의 뒷바라지를 했던 그 시민들의 모습, 그러니까 아주머니들이 밥을 해 나르고, 또 여기 국을 끓여 나르고, 또 먹을 걸 제공하고, 또 운전기사들이 많은 운송 수단을 제공하고, 또 하나는 여타 시민들의 높은 시민의식, 그리고 정말 하나된 모습, 그런 굉장히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우리가 항쟁 당시에 아픈 기억들보다는 이 분의 마음속에는 그것과 함께 정말 따뜻한 전라도의 정 그 마음을 많이 가지고 계셨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전하고 싶으셨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앵커: 말씀하시는 거 들은 참석자들 반응은 어떠셨나요?

▲정성업: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 본국인들보다 더 이 사실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었고, 또 이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니.

△앵커: 본국인이라는 단어를 쓰시는 거 보니까 해외에 계시는 게 실감이 좀 나는데 다른 한 분 아까 강현자 이갑산 상임대표님 이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정성업: 이갑산 대표님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그때 학생 운동을 하시니까 도저히 공부가 안 돼서 미국에 가서 공부만 해야겠다고 미국에 유학을 오셨어요. 그런데 5.18이 일어나면서 다시 이분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앵커: 그러니까 데모하는 거 피하러 미국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서 데모를 하신 거네요.

▲정성업: 그래서 이분이 이제 나이 들어서 오셨기 때문에 유학생 리더십도 있는 데다가 그 때 당시에 유학생 그룹을 이끌어서 남가주 학생 민주학생연합회를 구성을 합니다. 남가주 민주학생연합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제 LA 5.18 항쟁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앵커: LA에서도 5.18 항쟁이 있었나요?

▲정성업: 분명히 있었죠. 그래서 김상돈 선생님 그러니까 서울시장 하셨던 그 때 당시에 와 계셨는데 김상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서 미주 한인 조국 민주화 운동 협의라는 것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가주 민주학생연합회와 같이 민주 한인 조국 민주화운동 협의회가 LA에서 5.18 항쟁이 시작이 된 겁니다.

△앵커: 뭐 어떤 양태 양상으로 전개가 됐었나요?

▲정성업: 처음에 시위를 시작한 것은 한 300여 명으로 시작을 했고 나중에는 1천여 명까지 불어나 시위를 했고 그리고 그 시위의 중심에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이갑선 선생님께서 여기서 해 나가셨죠.

△앵커: 5.18 당시 현지에서 시위를 벌였을 때 현지의 반향 같은 게 좀 있었나요. 어땠나요.

▲정성업: 이 분들이 시위를 벌이는데 시위를 해도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1천여 명이 모였지만 그래서 안 되겠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모집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청년들이 의용군에 전부 다 나와라 해서 1명의 지원자가 나왔는데 비자를 받으려고 하니까 총영사관 비자를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끝날 것이냐 아니다 해가지고 우리가 어차피 죽으러 가려고 생각했던 사람인데 우리가 그것이 피를 흘리자 그래서 헌혈 운동을 시작을, 코리아타운에 있는 적십자사를 찾아가서 헌혈을 하기 시작합니다. 300여 명이 헌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국에서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앵커: 헌혈을 한 거를 광주로 보내려고 하니까 받아주지 않아요?

▲정성업: 한국에서 그래서 그러면 받을 때까지 농성을 하자 해서 그 적십자사에서 농성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3일째 농성을 할 때에 미국의 메이저 신문사들이 아니 방송사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이 시위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죠.

△앵커: 당시 현지에서 할 수 있는 거는 다 하신 것 같습니다.

▲정성업: 힘을 다 해본 겁니다.

△앵커: 이갑산 대표께서는 오늘 강연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정성업: 이갑산 대표께서는 그때 당시의 상황을 아주 간략하면서도 가지고 계신 자료에 의해서 설명을 해 주셨고요. 이 분의 강조점은 이렇습니다. 5.18은 광주의 것만이 아니다. 5.18은 진보의 것만이 아니다. 5.18은 우리 전 민족의 것이고, 그리고 5.18은 좌와 우가 보수와 진보가 구분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제 5.18이야말로, 그 정신이야말로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의 것이 돼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앵커: 뭐 개인적인 질문이긴 한데 제가 좀 찾아보니까 지난해 남가주 호남 향우회 회장을 하셨던데 고향이 호남 어디이신가요?

▲정성업: 예, 저는 함평입니다. 함평.

△앵커: 요즘은 나비 축제로 엄청 유명한데 미국 가신 지는 그럼 얼마나 되신 건가요?

▲정성업: 제가 미국에 남미로 처음에 갔을 때가 35년 전 미국에 온 지가 31년 됐네요.

△앵커: 해외에 계시면서도 42년 전 5월 광주를 잊지 않고 계시는데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대표님한테?

▲정성업: 제가 남가주 호남이 5.18을 계기로 해서 뭉쳐야겠다 생각을 하고 결정된 남가주 호남 향우회가 해외 최초의 호남 향우회입니다. 남가주 호남 향우회를 필두로 해서 전 세계 60여 개의 호남 향우회가 지금 총연합회가 결성이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차피 5.18은 광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광주 사람의 것이라는 인식이 많아 그동안에 5.18 행사를 해왔어요. 국가 행사로 공식 공인화되면서 그때부터는 이제 한인회가 합류를 하게 돼 있고 여타 단체들이 합류를 하게 되면서 우리가 기념재단을 상설기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

△앵커: 그게 그렇게 연결이 되네요.

▲정성업: 5.18과 호남 향우회는 하나입니다. 그 출발이 하나고 이제까지 함께 일해왔죠.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앵커: 앞서 잠깐 고향 얘기 했는데 흔히 고국을 떠나 흩어진 분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한국', '고국', '고향' 이런 단어들이 여전히 생각이 나시나요 어떠신가요?

▲정성업: 우리는 커서 뜨기보다는 그 전에 진출을 한 거죠. 그래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교포들의 생각이 그렇습니다마는 우리는 흩어진 민족이 아니고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곳, 그 다음에 이 한반도라고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가 다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짜 고국을 떠나서 해외에 살고 있지만 정체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고 대한민국 국민이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죠.

△앵커: 알겠습니다. 처음. 듣는 얘기가 많아서 재미있어서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 시간관계상 마지막으로 편하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성업: 고향에 계신 우리 광주 전라남북도에 계신 분들과 또 해외에 있는 우리 향우들과 정말 어떤 하나된 모습, 하나된 어떤 함께 할 수 있는 일 좀 많이 만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5.18이야말로 그러한 것을 묶어줄 수 있는 하나의 정신이며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매해 우리가 5.18을 기념하고

△앵커: 알겠습니다. 호남 향우회 한인회 앞으로 더욱 발전하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성업: 이렇게 화면으로 우리 고향의 어르신들 그리고 고향 분들을 이렇게 뵙게 돼서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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