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 깎아 만든 거장 권진규의 걸작들, 사흘 뒤면 전시장 떠난다

노형석 2022. 5. 1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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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폐막하는 역대 최대 권진규 특별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전시 성황리
19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에서 권진규의 소품 조각상들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1960년대 작은 크기로 다수 제작한 다양한 포즈의 여성상들이 벽돌과 블록으로 쌓은 거대한 좌대 위에 놓여 있다.

그의 걸작들은 ‘눈’을 봐야 한다. 그게 감상의 알짬이다.

텅 빈 듯한 눈매를 주시하는 순간 단박에 시선이 빨려 들어간다. 동그란 얼굴과 길쭉한 목, 도톰한 머리…, 눈을 중심으로 보이는 젊은 여인들 두상은 단순 질박하다. 하지만 필요한 살집만 얼굴에 남겨두고 그 위에 파거나 솟아오른 눈과 코, 입 사이엔 절박한 기운이 감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이 담긴 깊은 눈동자가 얼굴 모든 요소들을 통제한다. 몰입하면 한 작품 앞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된다.

이제 사흘 남았다. 51년간 자신의 삶을 고통스럽게 깎아내면서 침묵하는 듯한 표정 속에 영원과 존재의 본질을 감춘 여인과 동물들의 상을 만들었던 조각가. 1973년 5월4일 작업실에서 홀연히 스스로 삶을 접은 거장 권진규(1922~1973)의 역대 최대 전시 마당이 22일 막을 내린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24일부터 서울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에서 선보여온 ‘노실의 천사’ 특별전이다. 지난해 권진규 기념 사업회와 유족이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141점을 바탕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다른 개인 수장가의 컬렉션을 합쳐 꾸린 큰 전시회다.

1972년 11월 제자이자 모델인 김정제에게 보낸 권진규의 편지. ‘인생은 공(空), 파멸이다’란 문구를 통해 여섯달 뒤의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

권진규는 1948년 일본에 밀항해 이듬해 도쿄 무사시노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로댕과 부르델의 예맥을 이은 시미즈 다카시를 사사하며 서구 근현대 조각을 수학하고 1959년 귀국한 권진규는 서울 돈암동 작은 스튜디오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형(形)의 본질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진흙을 초벌구이 한 테라코타와 헝겊을 붙인 건칠 기법 등의 독창적 형식을 구사하며 20여년간 여인상과 불상, 동물상, 구상추상 부조 등 다채롭고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전시 제목은 1972년 <조선일보>에 실었던 자작시 내용에서 따온 것이다.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爐室·가마)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悔改昇華)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實存)을 나는 어루만진다”는 시구를 모티브 삼아 평생 ‘노실의 천사’를 찾으러 분투했던 작업들을 살펴본다. 평생 불교에 심취했다는 점에 착안해 1940년대 후반부터 1973년까지의 작업 시기를 입산, 수행, 피안으로 나눈 이 전시는 테라코타 초벌구이를 하며 작품을 만든 생전 작업실 특징을 살려 가마와 우물을 떠올리게 하는 얼개로 블록과 벽돌 좌대를 만들었고, 크고 작은 조각상들을 그 위에 대부분 망라해 펼쳐 놓았다.

1950년대 후반 일본에서 작업한 연인 도모의 테라코타 두상들.

유학 시절 조각의 뮤즈였던 일본 여성 도모의 테라코타 두상 석점을 필두로 1960년대 여러 크기로 다수 제작한 좌상, 와상, 입상 등 다양한 포즈의 여성상들이 벽돌과 블록으로 쌓은 거대한 좌대 위에 도열했다. 지원의 상을 비롯한 60년대 후반부터의 여성 흉상과 여성 두상 걸작들이 대부분 나왔다. 한국의 반가사유상과 보살·수행자상에 대한 오랜 관찰과 사생을 바탕으로 만든 건칠불상들과 수레바퀴 모양의 광배를 띄우고 그 아래 십자가에 매달린 거친 질감의 예수고난상도 볼 수 있다. 전시장 끝부분에서 맞는 ‘가사를 입은 자소상’은 작가를 승려로 형상화했다. 생사를 초월한 듯한 얼굴 표정이 숙연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스, 로마의 유적지에 새겨진 부조나 서양 탈을 모티브로 한, 입만 뻥 뚫리고 표정이 거세된 탈 작품이나 일본 고대 고분의 사람 모양 조형물 하니와의 소박한 감성이 깃든 소년의 상, 신라 토우 같은 소형 마케트(조형물의 실제 크기를 축소해 원형만 살린 작은 모형) 작품 등은 감상의 또 다른 별미다.

전시장 끝부분에서 관객들을 맞는 ‘가사를 입은 자소상’. 작가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생사를 초월한 듯 영적인 얼굴 표정이 강렬하다.

흔히 미술판에서 비운의 조각 거장 혹은 한국적 리얼리즘 조각의 개척자란 헌사를 붙이지만, 전시를 보고 나면 권진규는 동서양 고금의 사조를 두루 섭렵한 세계적 지평의 작가임을 직감하게 된다. 고대 이집트 상에 바탕한 그리스 아르카익 조각과 중세 로마네스크의 소박하고 경건한 조형 감각과 도나텔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조각의 기운생동한 사실성을 바탕으로 한반도 삼국시대와 일본 아스카 시대 불상의 깊고 따뜻한 인간적 감성까지 녹아들었다. 이런 융합의 경지를 특정한 서구 조각 트렌드에 치우치지 않고 60~70년대 국내 조각계에서 우뚝하게 구현해낸 것이다.

거리두기가 끝난 뒤 평일 1300여명, 주말 2000명 가까운 관객들이 찾고 있는 ‘노실의 천사’전은 누적 관객 6만명을 넘겼다. 방탄소년단(BT)의 리더 알엠(RM)이 개막 다음 날 찾은 사실이 인스타그램에 소개되면서 젊은 관객들이 그의 동선을 따라 관람하는 관행이 생겼고, 50~60대 중노년 여성층의 발길도 유난히 잦다고 한다. 22일까지 매일 오후 1시 전시 해설 행사가 열린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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