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책방' 12년만에 굿바이.."책방 장례식 잘 치러야죠"

김선식 2022. 5. 19.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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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 김현우 대표
지난 16일 서울 종로 교남동 ‘레드북스’ 서점에서 김현우(오른쪽) 대표와 양돌규 총무를 만났다. 김선식 기자

휴대전화나 삐삐(호출기)가 없던 시절, 문 앞에 붙인 전지 한장을 게시판 삼아 동아리·학회 모임과 개인 약속을 손글씨로 각자 공지하던 곳. 가요 사전심의제를 거부하고 ‘불법’ 제작·유통한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과 같은 불법 테이프와 비합법 지하조직 기관지들을 유통하던 곳. 1980~90년대 대학가 사회과학서점은 최신 운동 담론을 접하고 시대를 고민하는 이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 ‘사회운동의 위기’라는 말조차 식상해진 2010년 9월30일, 서울 종로구 교남동에서 뒤늦게 문을 열었던 사회과학서점 ‘레드북스’가 이달 말 끝내 폐업한다.

지난 16일 레드북스에서 만난 김현우(51) 대표는 “코로나 대유행 이후 손님이 점점 줄어 운영이 어려운 데다 입주 건물이 재건축에 들어가면서 문을 닫기로 했다”고 말했다. 레드북스가 입주한 건물 일대는 ‘돈의문2재정비촉진구역’으로, 세입자 이주를 앞두고 있다.

“지금은 금전적으로 문제없이 잘 정리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후원회원들이 그동안 많이 도와줘서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김현우 대표) “폐업은 책방 장례식인 셈인데 그동안 얼굴 못 본 후원회원들이 폐업 전에 들르면 상주로서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양돌규 총무) 이들은 5월말까지 책을 정리하며 문을 열어 둘 계획이다.

‘사회운동 위기’ 거슬러 2010년 개업
“전자책 주류될 때까지 10년 버티자”
학습모임·토론회·북콘서트·공연 등
한때 후원회원 200명·익명 독지가도

코로나 대유행·건물 일대 재개발로
“이달 말까지 단골 고객들에게 인사”

‘레드북스’에 진열돼 있는 1980~90년대 민중가요 카세트 테이프. 김선식 기자
레드북스에서 판매 중인 1948년 합동통신사 출간본 <얄타비밀협정>. 김선식 기자

김 대표는 처음엔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였던 김 대표와 최백순 종로 당협위원장이 쌈짓돈을 모으고 2000만원을 빌려 투자금 5000만원을 마련했다. “망하더라도 감옥에 가거나 인생을 망치지 않을 정도만 투자했다. (사회과학서점에 대한) 괜한 미련일 순 있겠지만 누군가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다면 좀 끌고 가보자고 생각했다.”

1990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 대표는 이어 연세대 사회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 두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과 ‘오늘의 책’을 학교보다 더 자주 들렀단다. 그 시절의 향수를 떨쳐내지 못해 결국 책방을 차린 것이었다. 위치를 서대문역에서 가까운 건물 2층으로 잡았다. 주변에 민주노총, 금속노조, 전교조 등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단체 사무실들이 여럿 있고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낡은 건물이 많아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쌌기 때문이다.

13평 남짓 책방의 헌책 코너 한가운데 널찍한 탁자를 놓았다. 학습모임, 토론회, 북 콘서트, 공연 등을 위한 공간이다. 그 자리를 마련하려고 2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1층에 있어야 쉽게 드나들어 장사가 되는데, 책방이 2층에 있는 건 우리 세대로선 굉장히 낯선 일”(양돌규)이었지만, “모임 공간은 확보해야 하고 임대료는 싸야 하니 1층은 엄두를 못 내고 2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김현우)

2012년 이후 손님이 제법 늘었다. 노조 활동가 인맥이 두터운 양돌규(49) ‘노동자 역사 한내’ 연구원이 책방지기(총무)로 합류한 효과였다. 그들은 책을 매개로 사람이 만나는 공간을 꿈꿨다. 양 총무는 “시대에 대한 반역을 논하는 책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야 반역도 물질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레드북스는 새 책과 헌책을 모두 팔았다. 헌책은 기증받았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개장 시각 전에 상자째로 갖다 놓곤 했다. 그 안에 1948년 나온 <얄타 비밀협정>이나 1980년 박현채 선생이 쓴 <민족경제론> 같은 ‘유물’들도 섞여 있었다. 김 대표는 “사회과학 책 중엔 아무리 좋은 책도 1쇄 찍고 절판되는 일이 많은데 그런 책들을 유통할 수 있고 기증 받은 헌책으로 매출도 올려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레드북스 후원회원은 많을 땐 200명까지 늘었는데, 지금은 100명 정도로 줄었다. 뜻밖에 후원 문의가 몰릴 때도 있었다. 2014년 5월8일 감리신학대 학생 8명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점거한 일이 있었다. 청와대로 행진하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경찰이 봉쇄하자 벌인 항의 시위였다. 시위 참가자들이 레드북스 단골이라는 사실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후원금이 답지했다. ‘그 학생들 공짜로 커피 주고 책 주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한 노년의 신사는 책방에 들러 그 학생들을 위한 돈 봉투와 편지를 놓고 가기도 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책방을 통해 만났다.

뜻밖의 조우는 설렜지만 손익계산은 냉혹했다. 책 판매 수익으로 책방지기에게 최저임금을 지급하고, 후원회비로 월세 100만원을 내면, 말 그대로 남는 게 없었다. 김 대표는 본업인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현재는 ‘탈성장과 대안연구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글 쓰고 강의해서 따로 생계비를 벌어야 했다.

김 대표는 개업할 때부터 폐업을 예감했다고 한다. “‘앞으로 10년 정도 있으면 전자책이 주류가 될 테니 그때 그만두면 된다, 일단 10년만 해 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와 재개발에 밀려날 줄은 그땐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양 총무는 “매출 때문에 울고 싶은데 (재건축으로) 뺨 맞은 격”이라고 했다.

김 대표가 파악하기론 현재 서울 소재 사회과학서점은 4곳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레드북스가 폐업하면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 성균관대 앞 ‘풀무질’, 고려대 앞 ‘지담서점’ 등 3곳이 남는다.

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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