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라는 딱지

한겨레 2022. 5. 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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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포스터를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45년 4월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한 일이다.

히틀러의 주장과 같다는 것만 지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효율성에는 부작용이 따랐는데, '히틀러'가 마치 엄청나게 신통한 부적처럼 보이게 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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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 포스터.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193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의 포스터를 접하고 놀란 적이 있다. 포스터에는 깃털 모자를 쓴 인디언의 유령처럼 흐릿한 얼굴 옆에 그리스 여신 같은 얼굴이 대조적으로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상단에는 ‘100년간의 진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1833년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강제퇴거 당하고 시카고의 역사가 시작된 해다. 그 100년간의 진보가 인종의 교체로 요약된다는 게 포스터의 전언인 셈이다. 끔찍하지만, 이런 것을 보면 이후 90년 동안 세계가 확실히 진보하기는 했다. 오늘날 이런 포스터를 보란 듯이 제작할 정부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45년 4월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한 일이다. 그때 그가 추종한 인종주의, 우생학, 광신적 민족주의 등 잘못된 사상들 역시 자동으로 공론의 장에서 퇴출됐다.

아마 실상은 그리 ‘자동적’이진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치 이데올로기나 그 변종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는 전제 자체가 의문시된 적은 없었다. 나치즘 혐의가 있냐 없냐는, 전후 정치와 공론의 장 입장권 검사 때 최소한의 기준 노릇을 했다. 이 검사에는 강력한 효율성이 있었다. 첫째, 결론이 빨랐다(히틀러가 나쁘다는 전제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으므로). 둘째, 이해하기 쉬웠다(히틀러의 악행이 너무 대규모였으므로). 아마 2차 세계대전 전 유사과학 이론과 피곤한 논쟁을 벌이던 학자들은 전후 왜 이렇게 일이 쉬워졌나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히틀러의 주장과 같다는 것만 지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효율성에는 부작용이 따랐는데, ‘히틀러’가 마치 엄청나게 신통한 부적처럼 보이게 된 점이다. 관련이 있든 없든 마음에 안 들면 히틀러 딱지를 붙이는 버릇은 최근 발명된 게 아니다. 전쟁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상대방을 악마화하려는 의도뿐 아니라, 히틀러 딱지가 수행한 놀라운 효율을 눈으로 확인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딱지는 만능이 아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으므로 채식주의는 나쁘다고 주장한들 채식주의가 퇴출될 리는 없다. 히틀러의 ‘악행’과 구체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처럼 알아차리기 쉬운 예는 많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뭐든 시도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이 나치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뇌과학은 정신분석에 적대적인데, 나치도 정신분석을 탄압했다. 따라서 뇌과학은 나치 과학이라는 것이다. 유사한 논리로, 1970~80년대 많이 읽혔던 어느 책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히틀러의 파쇼권력이 23회에 걸친 선거를 통해서 이뤄졌듯이 남베트남의 독재정권도 ‘선거’를 통해서 이뤄졌다.” 여기서 히틀러와 남베트남이 같이 묶이는 근거는 하필 ‘선거를 한다’ 외에는 제시되지 않고 있다.

리오 스트라우스(1899~1973). 위키미디어

유대인으로서 히틀러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철학자 리오 스트라우스는 1953년 ‘레둑티오 아드 히틀레룸’(히틀러로의 환원)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터무니없는 곳에 히틀러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부족한 논증을 대신하려는 경향에 붙인 이름이다. 2022년 현재 상황을 보면 푸틴은 ‘나치’를 토벌하겠다며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한국 정치가들은 여야 서로 히틀러 운운하며 다투고 있다. 나는 앞에서 히틀러를 들먹이는 이유가 시간을 절약하고 손쉬운 승리를 거두려는 욕망 탓일지 모른다고 썼다. 그러나 이 부적은 효력에 제한이 있고, 애초에 듣지 않을 무관한 곳에 사용을 남발하는 경향이 있다. 나중에는 정작 필요한 곳에 쓸 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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