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재의 보통과학자]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과학영웅의 몰락
“그동안 비타민C의 대량 투여를 계속해오면서 상당히 좋은 건강 상태를 유지해 왔던 폴링의 부인 애바는 결국 77세 되던 1981년 12월 5일에 암으로 사망했다. 암 진단을 받고 나서 5년이 지난 후였다. 통계에 따르면 그녀가 5년간 살아남을 확률은 13%였다. 폴링은 부인의 죽음에 망연자실했지만, 그녀가 오직 비타민C만 사용해 암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판단하고서 계속해서 싸워나가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해리 콜린스, 트레버 핀치《닥터 골렘》 중에서
과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노벨상을 받게 된다. 아무리 뛰어난 업적을 남겼더라도 운이 좋지 않아 일찍 사망하거나, 충분한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수상위원회가 뽑는 분야당 3명의 후보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결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 노벨상의 기준에는 분야당 3명이라는 철저한 제한은 있지만, 한 사람이 여러번 수상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없다.
지금까지 네 명의 과학자가 노벨상을 두 번 수상했다. 마리 퀴리, 존 바딘, 프레데릭 생어, 그리고 라이너스 폴링이다. 그리고 오직 라이너스 폴링만이 한 번은 노벨과학상을 또 한번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즉 라이너스 폴링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에 책임을 지는 연구가 한국의 과학기술정책 분야에서도 화두가 되는 시점에 과학자로서도 사회적 지식인으로서도 큰 족적을 남긴 진정한 과학계의 영웅으로 기억될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과학과 사회운동을 모두 성공시키다
폴링은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해가 1954년, 노벨평화상은 1963년이니 겨우 60대 초반에 두 개의 노벨상을 거머쥔 과학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된 셈이다.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폴링은 기계공장에 직공으로 취직해 가족을 부양하기도 했고, 학생훈련병 프로그램으로 겨우 농업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어렵게 대학원에 진학한 후부터 폴링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물리학과 수학을 부전공으로 화학을 주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특히 그는 구겐하임 장학재단의 도움으로 당시 양자역학의 메카였던 독일에서 좀머펠트, 슈뢰딩거, 막스 보른, 하이젠베르크, 닐스 보어 등과 교류하며 이미 젊은 시절 엘리트 과학자의 코스를 밟아 나갔다.
그가 탐닉했던 분야는 분자의 구조를 양자역학적 원리로 풀어내는 것이었고, 당시 막 발전하기 시작하던 X선 회절 등의 방법을 통해 이후 생화학의 기초가 되는 여러 원리들을 발견했고,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의 작동원리를 밝혀내기도 했다. 1940년대 말 폴링의 연구는 유전병인 겸상적혈구 빈혈증의 발생원리를 헤모글로빈 분자의 돌연변이로 설명하고,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해 생물학계를 뒤흔들기도 했다. 이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했지만, 폴링은 그들의 유일하고도 강력한 경쟁자로 존재했다. 왓슨은 그의 책 《이중나선》에서 폴링이 DNA의 X선 회절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언제나 두려워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폴링은 1946년부터 반전반핵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폴링은 부인인 에바와 함께 원자폭탄의 위험을 알리는데 헌신했고, 195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란드 러셀이 주축이 되어 발표된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 서명한 11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서명에 참여한 아인슈타인, 러셀, 막스 보른, 퍼시 브리지먼, 레오폴트 인펠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허먼 조지프 멀러, 세실 파월, 조지프 로트블랫, 유카와 히데키는 핵무기 폐기와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호소했고, 이 선언의 영향으로 1957년엔 ‘과학과 세계의 분쟁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가 개최되었다. 퍼그워시 회의는 모든 핵무기와 모든 전쟁의 근절을 호소하기 위해 결성된 국제회의로 이 회의를 통해 우리는 20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과학자들의 사회적 참여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당연한 일이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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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타민C에 극단적으로 집착한 과학자의 말로
조숙경 한국에너지공대 교수(당시 한국과학문화재단 과학문화연구소 박사)는 지난 2006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내는 월간지 '과학과 기술'에 라이너스 폴링의 삶을 소개한 글에서 ”폴링은 18세기 라브와지에가 완성한 화학혁명 이래 화학분야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으며 분자생물학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위대한 과학자임과 동시에 전세계 인류를 위한 반전운동과 반핵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했던 한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적었다. 또 ”폴링은 과학자가 어떻게 실험실 밖에서 과학으로 야기된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과학자가 사회적 의제들에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따로 강조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이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과학자도 촛불혁명에 참여할 수 있고 태극기 시위에도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시민으로서의 과학자가 정치적 활동을 펼치는게 아니라, 과학자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과학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의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맥락이어야 한다.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는 그의 저서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를 통해 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얼마나 긴밀하게 정치적 의사결정에 필요한지, 또한 과학자가 자연을 발견하는데 사용하는 방법론과 과학자사회가 과학지식을 굳건히 쌓아올리기 위해 만들어온 여러 도덕적 규범들이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과학기술자와 과학기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지닌 경계의 지식인들이 ‘부엉이’로서 과학과 사회 양쪽을 모두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폴링이 말년에 비타민C가 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극단적이고 검증되지 않는 주장으로 제도권 과학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대체의학 진영으로부터 연구비를 받는 등의 일탈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과학과 기술에 폴링을 삶을 조명한 글에도 그런 내용이 빠져 있다.
사실 폴링의 인생에서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화학 분야의 혁신이나 반핵반전시위보다는 비타민C를 둘러싼 한 과학영웅의 추락이 아닐까 싶다. 위에서 소개한 과학사회학자 해리 콜린스는 현대 의학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의 문제를 추적하는 책 《닥터 골렘》의 한 장에서 바로 이 과학영웅이 어떻게 비타민C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1950~1960년대 미국의 반핵반전운동의 주류세력은 당시 히피문화 혹은 반문화라고 불리던 자유로운 젊은이들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시 반문화 진영은 동양의 종교, 지구 전체와 몸 전체, 자본주의에 대한 의심 등을 공유하는 집단이었고,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뉴에이지 문화 속에서 대체 의료 또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당시 반전운동의 과학계 선봉이었던 폴링이 이런 문화에 탐닉해서 '비타민C 만능주의'라는 대체의학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게 어쩌면 상식적인 추론일지 모른다. 하지만 폴링은 반전운동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과학적 사고방식까지 버릴만큼 조잡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폴링의 비타민C에 대한 집착은 그가 자신의 과학적 추론을 지나치게 신봉했기 때문에 강화되었다.
콜린스는 이렇게 말한다. “1970년대에 폴링이 비타민C 치료법을 옹호한 것은 과학자로서 그의 경력이 쇠락하기 시작했음을 말해 주는 신호로 흔히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폴링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그의 연구는 분자 생물학의 환원주의적 교의와 실험적 방법을 계속 따랐으며, 역설적이게도 그의 비타민C 치료법은 전일론적 의료가 비난해 마지않는 의료의 ‘마법 탄환’ 같은 냄새를 풍겼다."
즉, 폴링은 자신이 연구했던 겸상적혈구빈혈증이라는 사례를 바탕으로 비타민C 부족 또한 인류집단에 광범위하게 퍼진 유전적인 돌연변이라고 추측했고, 이를 분자교정의학을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비타민C에 대한 이론에서, 폴링은 철저히 과학적 근거에 기대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그의 과학적 성공과 경험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과학자로서 이른 나이에 이룬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어 나타난 셈이다.
과학자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
조 교수에 따르면 폴링은 자신의 과학적 추론법을 '추계적인 방법이라고 불렀다. 폴링은 ‘교육받은 추측’ 혹은 ‘훈련된 추측’과 ‘직관’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그(폴링)에게 새로운 연구결과를 가져오는 추측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학과 물리학, 그리고 수학에서의 방대한 지식에 토대한 것이었다. 그는 또 스스로가 평가 하듯이 엄청나게 운이 좋은 과학자였는데, 그러한 운은 그가 당시 과학의 다른 분야들에서 일어나던 발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 저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과학 분야를 넘나들며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고, 또 정답을 찾아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적으로 솟아 나오는 과학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접근 방법은 과학자의 실제 모습은 물론 과학의 사회적 기여과 관련해 시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폴링이 비타민C를 두고 그의 말년 내내 다른 과학자들과 의학자들과 부딪히고 논쟁했던 사실은, 그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투철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폴링은 훗날 자신이 혐오했던 대체의학계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야 하는 상황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비타민C를 이용한 암치료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철저하게 과학적 태도로 임했다. 사실 비타민C를 둘러싼 문제에서 폴링이 간과한 문제는, 과학적 태도나 과학적 근거의 문제가 아니었다. 임상실험을 둘러싸고 폴링과 그의 반대자들이 벌인 논쟁을 읽어보면, 그들 모두 철저한 근거에 기반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상식이다.
폴링은 훈련된 의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수학과 물리학, 화학과 생물학 모두에 통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고, 비타민C과 암에 대해서도 의사와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에겐 질병과 약물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임상실험에 대한 상식이 부족했다. 폴링은 철저하게 과학적인 태도로 끝까지 임상실험의 문제를 파고 들었고, 비타민C가 암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올때마다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폴링은 비타민C와 암치료에 대한 만족할 만한 임상실험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이 논란은 결국 폴링 측의 패배로 끝났지만 폴링은 죽는 날까지 그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당대 최고의 과학계 영웅이자 천재였고, 과학을 넘어 사회운동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 ‘착한’ 과학자의 말년은 왜 비타민C를 둘러싼 추한 논쟁들로 가득차게 된 것일까. 폴링이 비타민C 치료법을 통해 개인적 욕망을 추구한 것도 아니다.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자세와 비타민C를 대하는 자세는 같았다. 그는 오로지 인류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두 운동 모두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것이다. 그의 반전운동은 미국정부로부터의 감시와 통제까지 받으며 결국은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지만, 비타민C는 그렇지 않았다. 이 차이를 단지 나이를 먹은 폴링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설명을 찾을 수 있을까.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폴링과 같은 과학계의 대가들이 저지르는 여러 추문과 과오들은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제임스 왓슨은 흑인을 인종차별하는 발언으로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났고, 많은 유명한 과학자들이 성추행이나 인권탄압, 혹은 연구윤리 부정 등으로 경력을 마치곤 한다. 과학자가 사회적 지식인으로 존중받기 위해선, 또한 과학이 이들 영웅들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폴링의 사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참고자료
라이너스 폴링(조숙경, 2006, 과학과 기술 v.39) https://scienceon.kisti.re.kr/commons/util/originalView.do?cn=JAKO200641847826925&oCn=JAKO200641847826925&dbt=JAKO&journal=NJOU00296711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김우재 보통과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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