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디아스포라, 이슬람 아프리카.. 모두 '정처 없음'의 문학
대표작 '낙원', '바닷가에서', 그후의 삶' 출간
지난해 10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자로 탄자니아 출신의 영국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2)를 호명했다. “식민주의의 영향과 대륙 간 문화 간 격차 속에서 난민이 처한 운명을 타협 없이, 연민 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는 것이 선정의 이유였다.
1948년 영국 보호령이었던 동아프리카 연안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1964년 잔지바르혁명 이후 아랍계 엘리트 계층 및 이슬람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1968년 잔지바르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한다. 이후 영어로 10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소설을 써냈다. 그 스스로 난민이기도 했던 구르나는 특히 아프리카와 카리브해 및 인도의 탈식민주의에 관심을 갖고 제국주의의 유산을 문학으로 탐구해왔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하나도 없어 한국 독자들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노벨상 수상 이후 7개월 만에 구르나의 작품 세 권이 문학동네를 통해 번역됐다. 아시아에서 최초 번역 출간이다. 이번에 번역된 작품은 ‘낙원’(1994), ‘바닷가에서’(2001), ‘그후의 삶’(2020)이다. 각각 작가의 초기, 중기, 후기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공통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주의 통치가 남기 유산과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상실감을 그린다.
특히 국내 독자들이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1994년작 ‘낙원’이다. 작가가 네 번째로 발표한 장편소설로, 부커상과 휫브레드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구르나라는 이름을 알린 대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가상의 마을 카와를 배경으로 열두 살 소년 유수프가 열일곱 살이 되기까지 겪는 일을 그린다. 유수프가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인도양 스와힐리 해안,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를 거쳐 간다. 성장소설의 외피를 입고 식민화된 동아프리카와 임박한 전쟁의 모습을 소년의 눈을 통해 묘사한다.
출간을 기념해 작가는 18일 오후 한국 언론과 줌을 통해 온라인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영국에서 활동하며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로서, 동아프리카를 자신의 문학적 주제로 삼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내가 이야기하는 주제는 아프리카에만 국한된 것이 절대 아니다”며 “아프리카는 문화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다른 지역들과 교류하며 수백 년간 역사를 쌓아 왔기 때문에 나의 문학적 주제를 단순히 동아프리카로 국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작가의 설명처럼 그를 단순히 ‘동아프리카 출신 작가’로만 호명하는 것은 구르나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로 작용한다. 구르나가 태어난 잔지바르는 동쪽으로는 인도양,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본토, 남과 북쪽으로는 스와힐리어 언어권 문명사가 교차하는 곳으로 아랍계와 아프리카 본토에서 온 흑인, 남아시아인이 뒤섞인다. 구르나 역시 인종적으로는 인도계, 지역적으로는 아프리카, 종교적으로는 무슬림이라는 혼종적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국가의 이름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낙원’을 번역한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석좌교수는 해설에서 “구르나의 소설에서 국가나 국가주의는 서술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의식의 차원에서도 부재한다”며 “국가의 부재가 곧 그들의 정체성”이라고 설명했다. 국가가 부재할 때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은 “‘정처 없음’이라는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경험”(스위스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논평)이다. ‘바닷가에서’에는 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에 도착한 주인공 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이 등장한다. ‘난민=아프리카인’이라는 도식을 깨는 이 같은 설정은 이주하는 삶이 결국 보편의 경험임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작가는 간담회에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보다 깊게 이해하고 또 천착할 수 있다. 타인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알아 나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탈식민주의와 디아스포라, 이슬람 아프리카 등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문학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식은 많다. 그러나 정작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자리엔 모든 수식으로부터 벗어난 '문학' 하나만 남게 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다름을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 결국엔 같음을 깨닫게 되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작가가 말한 '문학'의 본질일 것이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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