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5·18 경찰 유가족의 용서와 눈물

윤기은 기자 2022. 5. 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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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참여했다가 돌진한 버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찰 중 고 정충길 경사의 유족과 버스 운전 가해 당사자가 배모씨가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에서 만나 사과와 용서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죄송합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사과드립니다.”

배모씨(76)는 19일 자신이 몰던 차에 치여 숨진 고 정충길 경사의 아들 정원영씨(54)의 손을 맞잡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정씨는 30초 간의 포옹으로 화답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42년 만이었다. 이날 배씨는 국립현충원 내 희생자들이 묻힌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묵념했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배씨가 비석을 쓰다듬는 동안 고 정 경사의 아내 박덕님씨(82)는 통곡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참여했다가 돌진한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경찰의 묘 앞에서 버스 운전 가해 당사자가 배모씨(왼쪽 세번째)와 유가족들이 참배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규명위)는 이날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경찰충혼탑 앞에서 ‘함평경찰서 순직 경찰 유족과 사건 당사자 간 사과와 용서의 장’을 마련했다. 5·18 민주화운동 때 버스에 치여 순직한 고 정 경사, 고 강정웅 경장, 고 이세홍 경장 등 피해자 3명의 유족 8명과 배씨가 참석했다. 다른 피해자인 고 박기웅 경장의 유족은 불참했다.

1980년 5월20일은 이들 유족에게 참혹한 날이었다.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들은 정부의 출동 명령을 받고 광주시 노동청 앞에서 시위대의 도청 진입을 막고 있었다. 오후 9시30분쯤 배씨가 운전하던 고속버스 한 대가 돌진해 경찰들을 치었다. 현장에서 경찰관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배씨는 버스에 시민군을 태우고 있었다. 배씨는 2017년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야간 시간대이고 사고 장소 주변에 뿌려진 최루가스로 인해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배씨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돼 1982년 12월 석방됐다. 법원은 1998년 재심에서 “헌정 질서를 수호하려는 행위로서 정당행위로 인정된다”며 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씨는 “오늘 배씨의 사과를 받겠다. 하지만 비극을 만든 책임자들이 먼저 분명하게 사과해야 한다. 그날의 상황 자체가 역사에 없었어야 했다”며 유족 대표로 화해문을 낭독했다.

정씨는 “정말 너무 힘든 자리”라며 “배씨는 우리 아버님들의 죽음에 책임자이지만 전부일 수는 없다. 이러한 역사적 모호함을 우리가 안게 됐다. 이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족의 아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또 “당신(배씨)이 모든 책임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힘들었다”며 “지금에 와서야 당신의 미안함이 우리에게, 어머님들께, 나아가 아버님들께 무슨 위로가 되겠느냐마는 당신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하는 마음에 가슴이 아플 뿐”이라고 했다.

정씨는 그러면서 “사과뿐만 아니라 화해의 자리가 돼야 한다는 생각도 이성에서는 들었지만, 감성에서는 쉽지 않았다. 어머님들은 안 만나겠다고도 하셨다”며 “‘정말 미안합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라고 말해주셔야만 한다”고 했다. 고 이세홍 경장 모친 강귀례씨(82)는 “어떻게 용서가 … 말로 용서한다고 용서가 되겠나”라며 “우리가 살아온 생각을 하면 어떻게 말로 다 할 수가 있겠나”라고 했다.

배씨는 “제가 지금 와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며 “저도 나름대로 그 상황과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그 현장을 꿈에라도 한 번 꿔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런 것은 도저히 (꿈에) 나오지 않더라”며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릴 수가 없다. 죄송하다. 막막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5·18 민주화운동 진압 작전에 투입된 군·경은 그간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공권력에 가담한 나쁜 사람’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정씨는 “아버지의 피해 사실을 말했지만 이웃으로부터 ‘그래도 경찰이었잖아’라는 말을 들었다”며 “아버지의 희생을 인정받기 위해 청와대나 국회 등에도 찾아간 적이 있지만 외면받았다”고 말했다. 정씨의 모친 박씨도 “세상에 말한마디 못하고 숨어서 사는거. 이게 정말 외로웠다”며 “어찌됐든 선생님은 사람 생명을 없앴고 우리는 죄인 아닌 죄인 돼 세상을 이렇게 살게 됐다”며 흐느꼈다.

유족들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데 투입된 군·경의 피해를 조사하고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보상안을 마련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배씨의 사과가 고인과 유족들이 피해 사실을 인정받는 가교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또 5·18 민주화운동 당시 투입된 군·경을 비판해온 5·18 관련 단체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진상규명위는 지난해 1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개정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군·경의 피해 사실도 조사하기 시작했다. 안종철 진상규명위 부위원장은 “유족의 심경을 충분히 헤아려 순직한 네 분과 부상당한 피해경찰관들 모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5·18조사위가 그 중심에서 경찰 가족과 함께하겠다”며 “조사 끝난 후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조치를 취할 것을 국가에 권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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