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싸워야 할 대상 아냐.. 행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

김민호 2022. 5. 19.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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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은 우리의 기억 체계가 지닌 하나의 결함이며 적어도 성가신 골칫거리라는 것이 이제껏 늘 일반적인 과학적 견해로 통했다. (중략) 더 나은 기억력은 언제나 고귀한 목표인 반면, 망각은 방지하고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스콧 A. 스몰

인류는 오랫동안 망각을 극복하려고 애써 왔다. 인간에게 사진처럼 정확한 기억력이 있었다면 시험을 앞두고 수험생들이 머리를 싸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뇌과학 역시 ‘어떻게 하면 더 잘 기억하고, 그 기억력을 유지할까’에 초점을 맞춰서 발전해왔다. 망각은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연구해온 스콧 A. 스몰 교수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저서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에서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다.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망각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생리현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설명한다. 망각은 복잡한 세상에서 쏟아지는 불필요한 정보들로부터 인간을 구해내는 장치이자 창의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토대다. 무엇보다 망각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어서 정신을 보호한다.

저자는 의사이자 알츠하이머병 연구센터장으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걱정한 증상 대다수가 질병으로 말미암은 ‘병적 망각’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상적 망각’이 존재하고 그것은 정신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기억과 균형을 이루는 망각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하며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본연의 진정한 인지능력”이라고 말한다.

기억과 망각이 이뤄지는 기본 단위인 뇌세포(뉴런). 가지돌기 끝에 있는 가지돌기가시 사이에서 정보가 교환되는데 기억이 생성되면 가지돌기가시가 늘어난다. 반대로 망각이 시작되면 가지돌기가시가 줄어든다. 북트리거 제공
기억과 망각에 관여하는 뇌 영역들. 후두는 기억을 저장하며 해마는 기억이 적절히 저장되도록 돕는다. 전전두는 기억을 열어서 인출할 때 관여한다. 북트리거 제공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과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오래전에 밝혀졌다.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기본 단위는 세포(뉴런)이다. 뉴런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간 가지돌기 끝부분에는 새싹처럼 ‘가지돌기가시’라는 작은 돌기가 수백 개나 붙어 있다. 가지돌기가시가 다른 뉴런의 가지돌기가시와 만나는 지점에서 정보가 전달된다. 인간의 경험에 따라서 뉴런들이 활성화되고 가지돌기가시가 충분히 늘어나면 뉴런들의 연결이 강화된다. 이것이 새로운 기억이 형성될 때 벌어지는 현상이다.

반대로 뉴런과 인접 뉴런이 함께 활성화되지 않으면 가지돌기가시는 점차 줄어든다. 이 때문에 망각을 다룬 초기 연구들은 망각을 ‘기억의 결함’ ‘가지돌기가시의 성장 도구가 녹슨 것’ 정도로 여겼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러한 망각은 정상적인 노화는 물론 알츠하이머병에서도 모두 발생했기에 둘 다 ‘병적 망각’의 유형으로 여겨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뇌과학이 발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가지돌기가시의 성장과는 별개로 정상적 망각에 관여하는 분자 모음이 발견된 것이다. ‘기억하는 도구’와 함께 ‘망각하는 도구’가 뇌에 내장돼 있는 셈이다. 저자는 ‘망각 도구상자’가 열리면 도구들이 조심스럽게 가지돌기가시를 분해해서 크기를 줄인다면서 이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무한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에 뇌에 망각 도구상자가 내장됐다는 이야기다.

예컨대 자폐증 환자 가운데 일부에게서 망각 기능을 축소하는 유전자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발견이 ‘자폐증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불안을 일으키는 인지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변화 없이 똑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학설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다만 저자의 주장과 별개로 많은 임상과학자가 자폐증이 한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상황, 또 자폐증이 장애가 아니며 사회성이 정상 범위 내부에서 극단에 있는 것이라는 의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 스콧 A. 스몰 지음ㆍ하윤숙 옮김ㆍ북트리거 발행ㆍ284쪽ㆍ1만7,500원

망각은 정신건강과도 관련이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의 경우, 충격적인 사고나 사건을 겪은 이후 몇 달 뒤부터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소거’에 결함이 생기는 증상이 대표적이다. 사고나 사건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서 환자를 괴롭힌다. 저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학창시절에 당했던 학교 폭력이 떠올라 괴로워하는 사례를 언급하면서 “기억 연결망 전체가 과잉 반응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다. 가지돌기가시가 병적으로 성장해서 기억이 과도하게 재생된다는 설명이다.

이스라엘 방위군 소속으로 ‘1차 레바논 전쟁(1982년)’에 참전해 참혹한 전투를 경험한 저자는 논의를 의학 너머로 이끈다.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했더라도 거기에 매몰되지 말자고 강조한다. 혼자 고립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삶에 유머를 더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충분히 잊으려고 노력하자’고 다독인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전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숭고한 점은 감정적 망각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용서한다고 해서 자신을 화나게 했던 사건을 실제로 잊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용서하기 위해서는 부글거리는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 잊어버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이점이다.”

김민호 기자 km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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