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거래로 몸값 버는 피랍 금융인..'납치'된 자는 누구인가[리뷰]

선명수 기자 2022. 5. 1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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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애덤 스미스의 유명한 경제 이론에서 착안한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은 금융 스릴러의 방식으로 돈과 욕망에 대해 묻는다. 연극열전 제공


어둡고 황량한 회색 무대에 철제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무대는 파키스탄 무장단체의 한 사설 감옥. 침대의 주인은 무장세력에 납치돼 이곳에 감금된 미국인 투자전문가, 닉 브라이트다.

올해 아홉번째 시즌을 시작한 연극열전의 두 번째 작품인 <보이지 않는 손>(부새롬 연출)은 납치된 금융인이 감옥 안에서 자신의 몸값을 옵션 거래로 벌어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슬람계 미국인 변호사의 몰락을 그린 연극 <디스그레이스드(Disgraced)>로 2013년 퓰리처상 희곡 부문을 수상한 파키스탄계 미국인 극작가 에이야드 악타의 작품이다. 국내 초연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화려하고 분주한 사무실이 아니라, 파키스탄의 남루한 감옥 안에서 금융 자본주의의 민낯을 예리하게 비추는 연극이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파키스탄 지사에서 일하는 닉은 그를 은행의 거물급 인사로 오인한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된다. 파키스탄을 착취해온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사명’을 갖고 있는 이 무장단체가 요구한 몸값은 1000만달러. 그러나 회사도, 미국 정부도 이 엄청난 몸값을 지불할 의사는 없다. 닉은 몸값을 낮춰달라고 요구하지만 좌절되고,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닉이 탈출할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몸값을 버는 것이다. 닉은 무장단체의 수장 이맘 살림에게 원하는 금액을 벌어주겠다고 제안하고, 조직원 바시르의 도움을 받아 풋옵션 거래를 시작한다.

연극은 비좁은 감옥에 갇힌 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해 한 국가의 경제가 휘청이는 상황을 보여준다. 미국을 경멸하는 바시르에게 “그래도 트럼프가 나치보다는 낫지 않아요?”라고 반문했던 닉과 해방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가득 찼던 바시르는 폭탄 테러가 발생하자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미리 입수한 테러 정보를 통해 클릭 몇 번으로 막대한 돈을 번 두 사람은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다는 소식에 잠시 소름끼쳐하면서도 다시 투자에 몰두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자놀이’를 죄악으로 여겼던 바시르는 말한다. “당신 손에 피 묻힌 거 아니잖아요.” 이들의 ‘이익창출 행위’는 파키스탄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얽히고설키며, 끝내는 피를 뿌린다.

연극은 납치된 금융인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긴박한 ‘탈출기’의 형식을 취하지만, 이 작품의 묘미는 탈출 그 자체보다 인물들의 심리 변화에 있다. 비록 ‘납치’라는 폭력적 수단을 사용했지만 나름의 뚜렷한 정의와 신념으로 뭉친 이슬람 공동체가 어떻게 변모해가는지 연극은 더 공들여 보여준다. 닉에게 ‘자본주의 교육’을 받으며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에 눈뜬 바시르는 자본의 힘에 도취해 폭주하기 시작한다. 존경받았던 조직의 수장 이맘 살림 역시 돈의 맛에 취해 사유재산 증식에 몰두한다. 이 무대가 닉이 대변하는 금융자본주의와 바시르가 대변하는 제3세계 민족주의 집단 두 세계의 만남을 그린다면, 과연 ‘납치’된 것은 누구일까. 연극의 말미, 바시르는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인질범에게 동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에 걸린 것은 자신이라고 털어놓는다.

닉은 끝내 ‘자유’를 얻지만, 그렇게 원했던 감옥 밖 세계는 이제 테러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닉을 풀어주며 바시르가 남긴 말은, 여전히 전쟁에서 죽음보다 돈을 먼저 보는 극장 밖 세계를 향한 냉소처럼 들린다. “걱정 말아요, 당신 손에 피를 묻힌 건 아니었잖아요.”

연극은 닉이 갇힌 작은 방을 단 한 차례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거미줄처럼 연결된 냉혹한 돈의 세계를 그린다. 무대가 단출한 만큼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를 통해 가둔 자와 갇힌 자의 미묘한 권력관계와 심리변화를 드러내는 연극이다. 배우 김주헌, 성태준, 김동원, 장인섭 등이 출연한다.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6월30일까지.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의 한 장면. 연극열전 제공
연극 <보이지 않는 손>의 한 장면. 연극열전 제공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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