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깃한 칡국수·달콤한 감자빵.. '입맛의 구황' 책임지는 별미

기자 2022. 5. 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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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영월 동굴칡국수의 칡비빔국수.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 이우석의 푸드로지 - 구황작물

감자·고구마·메밀·칡·토란 등

재배기간 짧고 험지서도 잘자라

열량 높고 영양가 많은 식재료

묵·술 등 만들어 다양하게 활용

쌀 농사 망하면 급히 심어 먹고

보릿고개 이겨내게 한 일등공신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즐거운 달이다. 마침내 지긋지긋한 팬데믹을 보내고 엔데믹 시대를 맞아 일상을 회복하는 중이다. 나들이와 소풍, 각종 모임이 재개되는 등 여러 반가움이 깃든 시절이다. 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인 1960년대만 해도 5월은 연중 괴로운 시기였다. 넘어가기 어렵다는 보릿고개가 딱 지금이었던 까닭이다. 전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이미 바닥났고, 올 초 심어 놓은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쯤, 끼니를 챙기기 어려웠던 시기가 ‘힘든 고개를 넘는 것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 보릿고개다. 한자로는 맥령기(麥嶺期) 또는 가난한 봄이라 춘궁기(春窮期)라고도 한다.

미칠 노릇이다. 쌀은 떨어졌는데 아직 퍼런 보리 싹을 바라만 봐야 했으니 속이 터진다. 이때 굶주림을 때우는 음식을 모두 일러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 통칭한다. 돼지감자(뚱딴지), 감자, 도토리, 고구마, 메밀, 콩, 옥수수, 토란, 칡, 마, 조, 피, 기장 등인데 꼭 봄날 거두지 않아도 미리 저장해 놓고 보릿고개에 대비할 수 있어 비황작물(備荒作物)이라고도 한다. 죄다 탄수화물 위주지만 요즘은 오히려 쌀보다 다양한 영양소가 많다고 해 현대인들의 건강식으로 환영받는 작물들이다. 이마저 없으면 산나물과 나무뿌리, 나무껍질도 끓여 먹었다. 이때는 작물은 아니니 구황식품이라 했다.

과거 농민들이 수탈과 기근을 견디지 못하고 난을 일으켜 낫과 호미를 들었을 때, 쫄쫄 굶은 농민들이 그나마 보리밥이라도 먹으며 지냈던 부잣집 머슴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구황작물이 오히려 몸에 좋았기 때문이라는 우스개 섞인 분석도 있다. 현대에 들어선 외려 쌀보다 더 비싼 값을 쳐주는 구황작물이 많다. 조나 메밀만 해도 확연히 그렇다.

구황작물이 되기 위해선 재배 기간이 짧고, 저장성이 좋아야 한다. 게다가 주식인 쌀과 보리를 경작해야 하는 논밭을 점유하지 않고 밭두렁이나 야산에 심어도 잘 자라야 한다. 산에서 캐 오면 더 좋다. 금세 자라는 순무나 콩, 감자, 옥수수 등이 대표적 구황작물이다. 주식으로 먹어도 될 만큼 활용도가 높고 많은 수확량 등 경작 효율이 좋아야 한다. 쌀보다 병충해나 가뭄 등에 잘 견디는 작물이 많다.

옛날에는 보리나 쌀농사가 실패할 것 같으면 황급히 감자나 메밀을 심어 다가올 기근 위기에 대비했다고 한다. 마와 칡을 캐 먹고 도토리를 주워다 묵을 쑤어 먹었다. 칡은 특유의 단맛과 효능 덕에 요즘엔 약재나 건강보조식품으로 많이 쓰이지만 그야말로 구황에 좋은 초근(草根)이었다(실제 나무로 분류한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산에 올라가 칡뿌리를 캐다가 갈분(葛粉)떡을 만들어 허기를 달랬다. 금방 무럭무럭 자라니 칡이 떨어질 걱정은 없었다.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갈등(葛藤)이란 말 역시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 형상에서 나왔다. 현대에 들어선 간에 좋고 향도 좋아 녹말을 내 칡칼국수를 만들어 별미로 먹는다.

도토리는 전 세계에서 거의 한국인만 즐겨 먹는다. 상수리나무 열매지만 외국에선 견과류에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에도 도토리 음식이 드물다. 다람쥐와 이베리코 흑돼지 그리고 한국인만 열심히 먹는다. 우리는 도토리 녹말을 가져다 묵을 쑨다. 이 또한 별미다. 특히 요즘 같은 산행 시즌에는 산 아래 주막에서 막걸리에 도토리묵 한 접시를 먹는 재미가 흥하다.

고구마는 1763년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 조엄이 가져온 이래, 구황작물로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고구마는 동래(부산) 영도에서 시배한 후 전국으로 퍼졌다(영도에는 조내기 고구마 기념관이 있다). 달콤한 마라 해 감저(甘藷)로 불리다 감자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들여올 당시 이름(고코이모·孝行藷)을 음차해 고구마가 됐다. 그냥 먹어도 맛이 좋아 처음엔 그저 삶아 먹었지만 보릿고개에 대비해 말려 놓았다가 빼때기죽을 끓여 먹는 등 비상식량 역할을 했다.

밀이 들어오며 구황 역할 대신 기호품 위상을 차지한 이후로 고구마는 튀김, 맛탕(拔絲), 당면, 냉면, 심지어 소주도 만드는 등 다양한 용도의 식재료로 쓰이고 있다. 뿌리뿐 아니라 고구마순도 맛좋은 반찬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 이후 국내에 들어온 감자는 강력한 구황 역할을 하는 작물로 자리매김했다. 재배 기간이 짧고, 추운 기후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니 이만한 대체품이 없었다(심지어 SF영화 ‘마션’에선 화성에서도 경작하는 작물). 게다가 덩이줄기라 감자꽃이 피지 않아도 바로 열리고, 다 익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생장 중에도 필요할 때 캐서 먹으면 되니 정말 끝내주는 구급 구황작물이다. 영양도 많다. 기아를 면할 정도로 열량이 높고 필수 아미노산도 들었다. 도입 이후 순식간에 식탁을 점령했다.

안데스 출신인 감자는 서양에서도 그 활약이 뛰어났다. 그래서인지 현재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이 재배하는 작물이 됐다. 농업 기술이 혁신되기 전, 기근을 빈번히 겪는 것은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탈의 영향으로 기근의 피해가 심화된 역사도 적잖다. 이때 감자가 나타나 구황의 아이콘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아일랜드 대기근(The Great Famine)이다. 1847년부터 1852년까지 일어난 인류역사상 최악의 아사(餓死) 사태를 말한다. 영국의 밀 수탈에 신음하던 아일랜드에선 감자를 먹고 살았는데 갑자기 감자 역병이 돌아 그야말로 씨가 말랐다. 약 100만 명의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고 그만큼의 국민이 터전을 버리고 이민길에 올랐다. 약 800만 명의 인구 중 4분의 1이 이때 기근으로 증발한 셈이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선 감자를 ‘악마의 과일’이라 해서 잘 먹지 않았지만, 영국인 지주에게 밀과 가축을 모두 빼앗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그나마 빨리 크고 효율이 좋은 감자를 심어 끼니를 이어 나갔다. 감자는 구황 효능이 높았지만 신대륙으로부터 흘러든 역병이 돌아 모두 썩어 버려 갑자기 먹을 것이 사라졌다. 게다가 영국 정부가 난민에 대한 구호를 중단하는 바람에 식물 뿌리와 잎사귀, 심지어 해조류(Irish Moss)까지 뜯어 먹으며 버텼지만 재앙을 피해 가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신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현재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이민 민족(약 4000만 명) 중 하나가 성씨가 맥(Mc)이나 오(O)로 시작하는 아이리시계이다. 영국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장한 이들은 독립전쟁 당시 미군으로 활약하며 혁혁한 성과를 남겼다. 구황의 실패가 낳은 역사다.

열량 과잉의 시대인 요즘 세상에 구황은 없지만 식욕 부진이 큰일이다. 토란탕이며 도토리묵, 메밀국수, 칡칼국수, 고구마죽 등은 굶어 죽을까 봐 먹는 음식이 아니다. 과거 목숨을 살렸던 구황식품들이 별미로 나서 입맛을 살리고 있다. 마침 하지(夏至)가 다가온다. ‘하지’ 하면 태평양 전쟁 때 미군 사령관(John R Hodge)과 감자가 유명하다. 포슬포슬한 하지감자가 나오면 덧없는 식욕의 보릿고개도, 입맛의 ‘구황’도 비로소 끝이 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감자탕 = 용산고 앞에서 70년 동안 감자탕 백반으로 입맛을 사로잡아 온 노포다. 돼지 척추뼈를 오래 끓여서 감자와 함께 먹는 경기, 강원도식 음식이다. 척추뼈는 은근히 먹을 것이 많다. 담백한 살을 발라 먹고 국물에 밥을 말아 고소한 감자와 함께 먹으면 배 속이 든든하다. 얼핏 캔 참치 살 같은 척추 사이사이의 살은 돼지 어느 부위보다 진한 풍미를 낸다. 서울 용산구 후암로 1-1. 8000원.

◇토란탕 = 매끄럽고 촉촉한 식감의 토란은 과거 구황작물이었지만 요즘은 건강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식재료다. 특히 일본에서 인기 있다. 토란의 본고장 곡성에선 토란과 들깨를 함께 끓여 낸 토란탕을 먹는다. 곡성 오일장 순한한우명품관은 소고기 육수에 들깻가루, 토란을 듬뿍 넣은 걸쭉한 탕으로 입소문을 탄 집이다. 국물은 고소하고 토란은 입천장에 혀를 밀어 으깰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곡성군 곡성읍 곡성로 856. 1만 원.

◇칡국수 = 고씨동굴 앞에 위치한 이 집은 강원 토속메뉴 칡국수로 소문난 집이다. 반죽에 칡 전분을 넣어 굵은 면발이 씹을수록 쫄깃하다. 멸치와 해초 육수에 다양한 채소를 얹고 칡 전분을 섞은 국수를 말아 낸다. 매콤한 양념장은 시원한 육수에 포인트를 주고 아삭한 채소는 씹는 맛을 더한다. 칡국수 비빔 버전도 있다. 감자전과 감자떡도 파니 영락없는 구황식품 전문점이다. 영월군 김삿갓면 영월동로 1121-10. 7000원(가격 같음).

◇바쓰 = 상해소흘은 이름처럼 안주도 다양하고 값도 저렴해 한잔하기에 좋은 곳이다. 소흘(小吃), 중국어 발음으로 ‘샤오츠’는 간단한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란 뜻이다. 국내에는 맛탕으로 알려진 ‘바쓰’(拔絲)를 파는데 고구마가 아닌 감자로 한다. 깍둑 썰어 갓 튀겨 낸 감자를 불에 녹인 설탕물에 버무려 낸다. 뜨거운 상태로 바로 차가운 물에 담갔다 먹으면 설탕 옷이 굳으며 바삭함이 더해진다. 서울 마포구 동교로 272. 1만5000원.

◇감자와 고구마튀김 = 3대가 하는 햄버거 노포가 춘천에 있다. 공지천 옆 라모스 버거. 번부터 패티, 소스까지 수제로 만드는 집인데 다양한 메뉴가 있다. 햄버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감자튀김이다. 웨지 감자를 부드러운 속살이 유지되도록 뜨거운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 냈다. 달콤한 수제 고구마튀김 역시 직접 채를 썰어 주문 즉시 그때그때 만든다. 치즈를 듬뿍 끼얹은 뉴욕치즈 여신버거는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춘천시 옛경춘로 835. 감자 6900원, 고구마 7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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