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머리 밀어주는 '바리캉 활동가'.. "삭발은 인생을 건 투쟁"

박지영 2022. 5. 19.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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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연 삭발시위 돕는 강희석 활동가>
얼결에 시작했지만 나름의 삭발 절차도 정해
큰 결심인 것 알기에 행동 하나하나에 정성
"머리만은 안 민다고 했는데 삭발한 사람도"
강희석 나야장애인권교육센터 활동가가 이달 3일 경복궁역에서 진행된 삭발식에서 삭발 결의자의 머리를 자르고 있다. 박지영 기자

짧게만 깎으면 되는 게 삭발이라지만, 바리캉을 머리에 댈 때마다 온 정성을 다한다. 삭발이 끝난 후 '장애인권리예산 쟁취'라고 쓰인 머리띠를 묶어줄 때도 손끝에 힘을 준다. 장애인들이 왜 한 달 넘게 릴레이 삭발을 이어가는지, 그 이유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3월 말 시작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삭발 투쟁에서 머리를 미는 역할을 맡은 강희석 나야장애인권교육센터 활동가 이야기다.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강 활동가는 "삭발은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라며 시위 당사자들의 절실한 심정과 처절한 현실을 강조했다. 그런 결의를 알기에 삭발을 도울 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강 활동가는 "장애인의 삶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며 "지역사회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얼마나 큰 결심인지 알기에"… 모든 행동에 정성 다해

강 활동가는 이번 삭발 투쟁 전까진 미용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센터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에 대해 교육하는 일을 해왔다.

강 활동가는 "얼떨결에 바리캉을 잡게 됐다"고 처음 삭발을 거든 날을 회상했다. 지난달 1일, 대상자는 권달주 전장연 상임대표였다. 강 활동가는 "삭발 시위를 시작한 지 3일째였는데, 아직 누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시기였다"며 "그날은 이른 아침부터 현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머리를 밀게 됐다"고 말했다. 그 이후 강 활동가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삭발식에 참여하고 있다. 인터뷰가 있었던 날까지 강 활동가가 삭발해준 사람은 17명이다.

강 활동가가 12일 오후 장애인권교육센터 사무실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보이고 있다. 박지영 기자

얼떨결에 시작했지만 한 달 넘게 삭발식에 참여하면서 강 활동가는 나름대로 절차를 정했다. 삭발식이 시작되는 오전 8시보다 일찍 시위장에 도착해 그날 삭발을 결의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 잠은 잘 잤는지' '지금 마음은 어떤지'처럼 안부를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어 머리를 밀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지 묻는다. 뇌병변 장애인의 경우 삭발 과정에서 몸 한쪽에 심한 강직이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삭발 직전에 한 번 더 물어볼 테니 그때 마음을 바꿔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강 활동가는 "직전에 담배 한 대 태우고 오겠다는 분은 있었지만, 아직까지 철회한 사람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마치 예식을 주관하듯이 강 활동가가 진심을 다하는 이유는 '삭발은 인생을 걸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강 활동가는 "삭발 결의문을 보면 지하철 탑승 같이 최근 이슈가 된 내용만 말하는 분은 한 사람도 없다"며 "다들 어린 시절 받은 차별이나 장애를 가지게 된 순간부터 회상한다"고 말했다.

강 활동가는 자신이 삭발을 도운 모든 사람을 기억하지만, 좀 더 특별하게 남는 사람도 있다. "장애인운동을 오래 하신 분인데 '그동안 머리만은 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밀게 됐다'고 우시며 삭발한 분이 있었어요. 그만큼 장애인이 처한 현실은 비참하고 장애인권리예산 반영 요구는 절실하다는 겁니다."


"장애인 삶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정의돼"

10년 넘게 장애인 운동에 참여해온 강 활동가지만 삭발을 통해 깨닫게 된 점도 많다. 강 활동가는 "뇌병변 장애인이 목디스크 수술을 한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머리를 미니 목의 수술 자국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스스로 머리를 잘 감지 못해 두피에 지루성 피부염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많이 봤다"고 안타까워했다.

강 활동가는 "같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서 사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은 달라진다"며 "장애인의 삶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정의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애인이 바라는 게 너무 많다'거나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되지 않았냐'는 말은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한국 사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는 정책을 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박지영 기자 jy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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