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브랜드 ‘머슴’에서 ‘주인’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대 부산 범천동, 당감동 일대는 세계 신발 산업의 메카였다. 나이키,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 운동화의 70~80%를 삼화고무, 동양고무, 태화고무 같은 토종 기업들이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했다. 나이키의 무리한 납품가 인하 요구에 화가 난 기업들이 프로스펙스, 르까프, 월드컵, 슈퍼카미트 같은 토종 브랜드로 딴살림을 차렸다. 프로스펙스, 르까프가 잠깐 국내 시장 점유율 1~2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브랜드 파워에서 밀렸다.
▶세계 최초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뿌리는 미국 텍사스주 얼음 제조사였다. 빵, 우유 같은 식료품도 함께 팔면서 수퍼마켓처럼 진화했다. 이를 눈여겨본 일본 유통 기업이 1974년 일본에 세븐일레븐 1호점을 열었다. 대박이 났다. 점포수가 2만개를 넘고 매출이 모기업을 넘어서면서 미국 모기업을 인수해버렸다. 이후 세븐일레븐은 세계 17국에 7만개 점포를 가진 일본계 편의점 제국이 됐다.
▶국내에서도 세븐일레븐처럼 외국 모기업을 인수하는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 현지법인으로 출발한 스포츠 의류업체 휠라 코리아가 2007년 100년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휠라 본사를 인수했다. 이후 휠라는 2011년 미래에셋그룹과 손을 잡고 세계 최대 골프용품 브랜드 타이틀리스트를 인수했다. 작년엔 국내 의류업체 F&F가 토종 펀드와 손을 잡고 세계 3대 골프용품 업체 테일러메이드를 인수했다. 패션 분야에선 성주그룹이 독일 명품 브랜드 MCM을 인수해 몸집을 크게 키웠다.
▶화장품 업계의 숨은 강자 한국콜마가 원조 기업 미국콜마로부터 콜마(Kolmar) 브랜드를 사들여 콜마 상표의 주인이 됐다. 한국콜마는 제품 생산만 맡는 OEM 방식이 아니라 제품 연구·개발·생산까지 다 책임지고 주문 업체 상표를 붙여 공급하는 ODM(주문자 개발·생산)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K뷰티 산업의 엔진 역할을 하며 세계 600여 개 화장품 회사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 특유의 ‘노 브랜드’ 전략이 고성장 비결이었는데 앞으로 ‘콜마’ 브랜드를 어떻게 활용할지 궁금하다.
▶한국 기업들의 브랜드 전략은 창의성을 더해가고 있다. 패션업체 F&F는 의류와 아무 상관이 없는 MLB, 디스커버리 브랜드를 도입해 패션 브랜드로 재창조하는 혁신적인 마케팅 기법을 선보였다. 타 업종에서도 갤럭시폰(삼성), 제네시스(현대차), 스타일러(LG) 등 세상에 없던 K 브랜드가 속속 자리 잡아 간다. 기술로는 세계 1위 경쟁력을 가진 운동화에서도 토종 브랜드의 재기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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