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평등에 다음은 없다

오은 시인 2022. 5. 1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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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어렸을 때의 일이다.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온 남자아이가 놀림을 받았다. 분홍색을 입었다는 이유로, 여자 색깔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아이는 충격을 받았는지 사흘간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그가 분홍색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날,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데 모아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각자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말해볼까요?” 치킨을 말한 아이, 김치를 외친 아이, 수줍게 빵이라고 대답한 아이도 있었다. “나도 빵 좋아하는데.” 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웅성임이 시작되었다.

오은 시인

“각자 어떤 빵을 좋아하는지 말해볼까요?” 이어진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들의 입에서 좋아하는 빵의 이름이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크림빵, 크로켓, 단팥빵, 카스텔라 등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돌았다. 그때 한 아이가 “곰보빵이요!”라고 소리쳤다. 선생님이 환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도 곰보빵을 좋아하는데, 곰보빵이라는 이름은 마음에 안 들어요. 왜 그럴까요?” 아이들은 생각에 잠겼다. 몇몇 아이들은 자라면서 이따금 그 장면을 떠올렸다. 개중에는 곰보가 “얼굴이 얽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걸 알고 불편해진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배제되는 상황이 불편했던 아이는 선생님이 되었다. 그는 아이들 앞에 설 때마다 모두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크림빵과 단팥빵 중 어떤 것을 먹을지 고르는 것은 취향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왜 나이, 성별, 장애, 학력, 성적 지향 등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 짓는지 의문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도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답답하기만 하다. 거기서 지워지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에 선생님이 차이에서 시작되는 차별을 경계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선생님은 우리는 다 다르고 그 다름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한 달 넘게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외치는 단식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속되는 입법 촉구에도 국회는 요지부동 묵묵부답이다. ‘사회적 합의’를 이야기하지만, 이미 여론조사를 통해 국민의 절반 이상이 법 제정에 찬성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제는 차별이 나쁜 것임을 배운 이들도 어떤 차별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데 있다. 차이를 당연시하면서도 특정 차이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6월에 있을 전국동시지방선거 눈치를 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다음에, 다음에”를 외치다 보니 법안은 15년 가까이 테이블 위에만 있었다.

얼마 전, 야생화 군락지에 다녀왔다. 눈에 띄지 않더라도 모든 꽃에는 고유한 이름이 있었다. 그냥 꽃도 아니고 굳이 야생화로 통칭할 필요도 없었다. 똑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새가 조금씩 다 달랐다. 마치 사람처럼. 평생을 들여도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려서부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기꺼이 해왔다. 말이 어눌해서, 다리가 불편해서, 외국에서 와서,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차별받는 일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아이는 어느새 권리를 주장하며, 편의를 앞세워 차별하는 어른이 되었다. 서글픈 일이다.

야생(野生)은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람”을 뜻한다. 삶에서는 저절로 되는 게 없는데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저절로 되는 게 없을지라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성문 형태로 정리된 게 법이다. 그러므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는 것은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혐오와 소외를 막는 가장 빠른 길이다. 차별금지법이 하루빨리 제정되길 바란다. 평등에 다음은 없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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