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보다] 100일의 저항, 카셀 도큐멘타
[경향신문]
카셀 도큐멘타는 세계적인 미술행사다. 나치 정권의 만행에 대한 성찰 차원에서 시작됐다. 독일의 중부 도시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린다. 127년이라는 장구한 발자취를 지닌 베니스비엔날레에 비하면 절반의 역사에 불과하지만 권위 면에선 그 이상이다. 인류가 당면한 시급한 이슈들을 다양한 예술언어로 풀어내 동시대 미술의 풍향계로 불린다.
카셀 도큐멘타는 사회와 예술의 관계 속 급진적 실험성이 특징이다. 오는 6월18일 개막해 100일간 이어지는 제15회는 예술감독부터 색다르다. 2019년 선임된 루앙루파(ruangrupa)는 2000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설립된 비영리 예술 공동체이자 아시아 최초의 총감독이다. 2002년 나이지리아 출신 기획자 오쿠이 엔위저를 제외하곤 백인 남성이 거의 독식해 왔다는 점에서 이변으로 평가된다.
실제 카셀 도큐멘타 총감독은 주로 서구에서 활동하는 유럽 백인 남성 큐레이터가 지휘하는 1인 체제였다. 1955년 제1회부터 4번 연속 감독을 역임한 독일의 아놀드 보데에서부터 2017년 제14회 폴란드의 아담 심칙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랬다. 여성은 1997년 프랑스의 캐서린 다비드와 2012년 이탈리아계 미국 큐레이터인 캐롤린 크리스토프-바가이예프가 전부다.
참여 작가들 또한 남성이 압도적이었다. 바로 이전인 2017년만 해도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 4월 개막한 베니스비엔날레 참여 작가의 90%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다. 아시아 작가는 여전히 소수였지만 2019년에도 비엔날레에 이름을 올린 여성 작가의 비율은 50%가 넘었다.
전통이다시피 한 틀이 깨지고 혼성 단체인 루앙루파가 총감독을 맡은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작가와 아시아 작가의 활약을 점쳐볼 수 있게 됐다. 서구 중심의 예술지형에 금을 내며 문화이국주의에 편승한 담론의 편향성에서 벗어난 ‘주변의 주체화’와 더불어, 권력의 도구가 된 ‘거짓 지성에 저항’하는 사회적·정치적 글로벌 투쟁의 무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크다.
일각에선 루앙루파의 출신 국가와 경력을 근거로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도큐멘타를 당대 현안에 관한 혁신적 제안의 장으로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염려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예술에 관한 독일 작가 요제프 보이스의 100일 강연(1972)이나 인간과 자연의 연대를 보여준 ‘떡갈나무 프로젝트’(1982), 백남준의 위성중계(1977), 행동주의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동화’(fairy tale) 프로젝트(2007)와 같은 기념비적인 작업들이 탄생하던 시절에도 감독 역량에 대한 의구심은 늘 있어 왔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중요한 건 누가 감독을 맡든 예술가라면 아시아를 포함한 지구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고 시대를 진단하면서 스스로의 경계를 희석시키는 방식까지 고려한 전시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처럼 천박한 자본주의가 미술을 지배하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 가난하며 소외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억압과 불평등·부조리에 저항하는 파괴적 창조를 통해 예술의 역할과 정신을 되살리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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