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하늘
[경향신문]
그날 저녁답에 낯선 손님이 찾아와 아무개는 흰쌀밥을 지었어요. 평소처럼 사랑채 닫힌 문 앞에 밥상을 올린 뒤 돌아 나왔습니다. 며칠 전 날실을 감은 도투머리를 베틀에 얹어놓아 마음이 급했지요. 날실에 물을 축이고 바디를 몇 번 쳤는데, 갑자기 사랑으로 들어오라는 시아버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허리에 동여맨 부티를 끄르며 아무개는 밥에서 돌가루라도 나왔는가 겁이 났어요.
시집온 뒤 처음으로 사랑방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시아버지가 같이 밥을 먹자 했습니다. 상머리에 앉기도 처음이었어요. 늘 정지에 홀로 앉아 남은 찬에 식은밥으로 끼니를 때웠거든요. 아무개는 차마 숟가락도 들지 못한 채 몸을 떨며 앉아 있었지요.
밥상 앞에 앉았는데 어디선가 덜컥덜컥 소리가 들려요. 무슨 소린가 물었더니,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러앉아 이렇게 밥을 먹는데 며느리도 불러서 같이 먹자 했지요.
아무개는 고개를 들어 수염이 성성하고 눈빛이 형형한 손님을 바라보았어요. 손님은 시아버지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베 짜는 이가 하늘입니다. 며느리가 그대의 하늘이에요. 우리가 다 하늘입니다. 여기 놓인 밥 한 그릇도 하늘이에요. 우리는 하늘로써 하늘을 먹고 있어요.1)
아무개는 정신이 아득해졌어요. 밥 한 그릇이 하늘만큼 소중함을 모르지는 않았어요. 자라는 동안 먹는 때보다 주린 때가 더 많았으니까요. 오히려 자신이 밥 한 그릇보다 못하지 않다는 말씀이 놀라웠어요. 아침저녁으로 단정히 앉아 글을 읽는 시아버지에게 밥 짓고 베 짜는 자신이 하늘이라는 이야기가 놀랍고도 놀라웠어요.
낯선 손님이 머무는 동안 많은 이들이 사랑에 들락거렸어요. 이따금 나직하지만 또렷한 손님의 목소리만 낭랑할 때도 있었어요. 아무개는 마당을 지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곤 했어요. 며칠 뒤 동틀 무렵 손님은 올 때처럼 봇짐을 둘러메고 떠났습니다. 봇짐 위에 그동안 손수 삼은 짚신 한 켤레가 얹혀 있었어요.
그 후 환란이 오래 이어졌어요. 남녘의 도인들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나라가 나라답지 않다고 했어요.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원한을 풀고 함께 살아야 한다고 외쳤어요. 우리 도는 믿고 안 믿는 게 아니라,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하면 하지 않는 것이라며 모여들었어요.2) 궁지에 몰리자 임금답지 않은 임금이 외세를 끌어들였어요. 도인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목숨을 보전한 이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어요.
사람들이 집과 땅을 버리고 난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어요. 아무개도 식구를 따라 길을 떠났어요.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밤낮없이 걸었습니다. 재를 하나 넘고 발병이 날 즈음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하늘 높이 보름달이 떠 있었어요. 반짝이는 검은 강물 앞에 서니 말라붙은 눈물이 솟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누구는 윽박지르며 쫓아내고 누구는 집을 떠나 떠돌아야 하는 건가요. 봇물 터지듯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눈물 끝에 아무개는 갑자기 사라졌어요.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어요. 세상에는 달빛 은은한 하늘만 남았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니 아무개는 다시 아무개로 돌아와 있었어요. 몸과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웠어요.
오래전 봇짐을 둘러메고 떠난 손님의 말은 한 치 거짓 없는 진실이었어요. 글만 읽고 옳고 그름만 가리고 오로지 힘만 구하는 이들이 모두가 높아지는 세상을 어찌 알겠어요.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멀어지는 세상을 어찌 알겠어요. “그림자는 푸른 물속에 잠겨도 젖지를 않고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미인과는 말할 수가 없다오.”3)
이제 이 강을 어찌 건널까, 아무개는 어둠 속에서 중얼거렸어요. 강을 건널 수도 있고 못 건널 수도 있겠지만, 내 몸이 하늘임을 잊지 않고 살면 된다고 아무개는 다짐했어요.
1)<해월신사법설>, 라명재. 2)<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3)<동경대전>, 최제우(박맹수 역)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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