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5·18 알리려다 간첩 누명 쓴 '두레사건' 피고인들 42년 만에 무죄

글·사진 백경열 기자 2022. 5. 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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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계엄법·반공법 위반 혐의
5명 재심 청구 2년 만에
“5월18일 선고받아 감격”

두레사건에 연루돼 처벌받은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서원배씨(왼쪽에서 세번째) 등이 18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손을 흔들고 있다.

대구지역에 5·18민주화운동을 알리려다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한 이른바 ‘두레사건’ 피고인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대구지법 형사합의11부(재판장 이상오)는 18일 반공법·계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상용씨(사망)·서원배씨(65) 등 5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이같이 판결했다. 재판부는 계엄법 위반 건의 경우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하는 ‘범죄가 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한다고 봤다. 또한 반공법 위반 부분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라고 판단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재판부는 “1980년 5월17일 내려진 계엄포고는 과거 헌법 및 계엄법에서 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면서 “또 범죄의 구성요건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적용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을 미리 법률로써 규정해야 한다는 형법상 기본원칙) 등에 어긋난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의 상황을 대구에 알리려던 이들이 계엄군에게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넘겨져 옥살이 등을 한 사건이다. 당시 정씨 등은 대구에서 광주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공수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거나 퍼트리고, 공산주의 찬양 서적 등을 복사해 판매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경북지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1980년 12월4일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해 정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각각 징역형(10개월~1년6개월)을 받았지만 집행은 유예됐다.

정씨는 이듬해 4월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했지만 기각됐다. 이후 정씨는 2011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씨의 아내와 나머지 4명의 피고인은 2020년 7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등을 근거로 지난 3월11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서원배씨 등에 따르면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자 대구에서는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군사정권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두 지역의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양서조합’을 통해 교류하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사회과학 전문서적 등을 팔던 두레서점이 거점 역할을 했다. 이들은 동성로에서 ‘민주시민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5월27일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나면서 정씨 등이 만든 유인물은 소각되고 조합도 해산됐다.

서씨는 “42년 만에, 특히 5월18일에 무죄를 선고받아서 후배와 동료들에게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을 덜게 됐다. 이번 판결이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구 사람들에게도 2·28민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는,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5·18민주화운동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사진 백경열 기자 merc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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