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구르나 "문학은 타인의 삶 이해하는 데 도움 줘"
18일 한국 언론과 온라인 간담회
'바닷가에서' 등 세 편 국내 번역 출간
"내 소설은 식민 유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보편적 주제 지녀"
“문학은 무엇보다 즐거움을 줍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문학은 타인의 삶을 깊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사람들의 관계, 타인의 삶의 조건, 생각과 행동 방식 등을 이해하게 됩니다. 문학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가 18일 저녁 한국 언론과 온라인 간담회를 마련했다. <바닷가에서>(황유원 옮김) <낙원>(왕은철 옮김) <그후의 삶>(강동혁 옮김) 등 그의 소설 세 편이 문학동네에서 한꺼번에 번역 출간된 데에 맞춘 것이었다. 구르나는 지금은 탄자니아의 일부가 된 동아프리카 섬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으나, 탄자니아 수립 과정에서 아랍계 및 이슬람에 대한 박해가 거세지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 뒤 영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문학 교수로 일하는 동시에 작가로도 활동하며 장편소설을 10편 출간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고향 잔지바르를 배경으로 삼아 유럽 열강의 식민 지배의 유산을 다루고 있다. <낙원>을 번역한 왕은철 전북대 석좌교수는 이 때문에 “그의 소설들이 일련의 기다란 자서전에 해당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고 평가했다. 구르나는 18일 간담회에서 이런 평가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소설이 지닌 보편적 호소력 역시 강조했다.
“저는 소설에서 동아프리카와 유럽 식민주의의 만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보다 앞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프리카 작가인 월레 소잉카를 비롯해 치누아 아체베와 응구기 와 시옹오 같은 작가들이 그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제 소설은 또 아프리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프리카는 수백 년에 걸쳐 다른 지역과 만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제 소설은 식민주의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동시대적 주제 역시 다루고 있습니다.”
<바닷가에서>는 예순다섯 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망명한 살레 오마르와 그보다 삼십여 년 앞서 십 대 때 동독을 거쳐 영국에 정착한 라티프 마흐무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설은 모두 3개 장으로 이루어졌는데, 1장과 3장은 살레 오마르의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2장은 라티프 마흐무드를 화자로 삼았다. 살레 오마르가 라티프의 죽은 아버지 이름으로 된 위조 여권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이어 두 남자와 그 가족들 사이의 가해와 피해가 뒤엉킨 관계가 소설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풀려 나온다. 특히 3장은 살레 오마르가 라티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를 통해 라티프가 몰랐거나 오해하고 있었던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가 지닌 진실 전달과 치유의 힘을 알게 한다.
<바닷가에서>의 두 주인공은 성장기에 영어 교육을 받았고 영문학을 비롯한 유럽 문학에 상당한 소양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이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그렇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은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로 그의 비타협적이고 고집스러운 성격 그리고 업무에 대한 생각을 집약한 구절이다. 이 말은 낯선 영국 사회에 표착한 두 난민의 각오와 태도 역시 보여주는데, 정작 이들이 접촉하는 백인 영국인들은 이 유명한 표현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책에서는 얽히고설킨 인연의 가시 때문에 적대감을 지니고 다시 만난 두 주인공이 이 표현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적대감을 내려놓고 공감의 감탄과 미소를 교환하는 장면 역시 그려진다.
“제 소설에서 그렇게 묘사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모든 영국 백인의 문학적 배경 지식을 무시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살레 오마르가 바틀비의 그 말을 되풀이하는 건 일종의 유희이자 게임과도 같습니다. 살레 오마르는 그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일종의 문학적 단서를 남기는 것이죠. 이런 설정은 사실 글을 쓰고 읽는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살레 오마르나 라티프는 상당한 독서가이기 때문에 문학 작품 속 구절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고는 하는 것이죠. 저 역시 작가이자 독자이기 때문에, 이런 문학적 인유는 작가로서도 재미있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즐거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르나는 <바닷가에서>를 구상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경험들을 알려줬다.
“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 무렵 두 젊은이가 아프가니스탄 국내선 비행기를 납치해서 런던에 도착한 일이 있습니다. 승객은 연령이나 신분이 매우 다양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백발의 남자도 있었죠. 납치 다음날 많은 승객들이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 노인은 왜 친숙한 조국을 버리고 낯선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택했을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여기에다가, 영국에 온 체코 출신 난민들이 어디로 안내되고 어떤 숙소를 제공받는지 등을 다룬 <비비시>(BBC) 방송 프로그램과 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합쳐져서 이 소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 고향 잔지바르를 다시 방문했을 때 연로한 아버지가 길 건너 모스크로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어떤 경험을 겪으며 성장했을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가 그것이 10년 뒤 <낙원> 집필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낙원>은 탄자니아의 해안 마을 출신인 열두 살 소년 유수프가 탕가니카 호수와 콩고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카라반 여행과 모험을 줄기로 삼는다. 열두 살이었던 유수프가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한 소년의 성장기이자 비극적 사랑 이야기이며 동시에 한 세기 전 동아프리카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아름답게 되살려 놓는다. 구르나가 2020년에 발표한 최신작 <그후의 삶> 역시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를 식민 지배하고 있던 20세기 초를 무대로 삼아, 전쟁과 점령의 여파 속에 탈향과 귀향, 사랑과 상처의 생생한 드라마를 엮어 나간다. 문학동네는 이 세 작품에 이어 그가 2005년에 발표한 일곱 번째 소설 <배반>(가제) 역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구르나는 “작가로서 나는 남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어떤 신념을 가지라고 요구하지 않고, 다만 부정의에 대한 저항을 말하고 묘사하고자 한다”며 문학의 가치와 역할을 다시 강조하는 것으로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잔혹과 불공정뿐만 아니라 사랑과 따뜻함을 함께 다루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의 삶과 상황을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자 힘입니다. 제 소설이 한국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면 작가로서 매우 기쁠 것입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윤석열 사단 부활 알리는 ‘1차 쓰나미’가 왔다
- 임은정, 대구지검 ‘좌천성 인사’에도 “근무하고 싶었던 곳”
- 이수만 모교서 ‘에스파 성희롱’ 10일 만에…가해학생 징계
- 여야 의원 200여명 광주로 ‘표를 위한 행진’
- 문재인 정부 주요 보직 검사들 대거 ‘한직으로’
- 추앙하는 구씨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손석구씨 인터뷰]
- “기회 줘야” “협치 부정”…‘한덕수 표결’ 속내 복잡한 민주당
- 콜센터 일하는 어머니는 ‘재택근무가 싫다’고 하셨어…사연은?
- 도심 한복판, 두꺼비 새끼 1만2천마리…어디서 왔니
- ‘푸틴’ 때문에 ‘삼겹살’ 귀해질 줄이야…20% 비싸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