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서울을 걷다, 간판을 읽다

한겨레 2022. 5. 18.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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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길거리 간판에는 그 사회의 사회상이 응축돼 있다. 공동체 구성원의 취향과 지향하는 스타일 등이 녹아 있는 ‘시대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리의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스타일의 간판들이 자리하기도 한다. 지난달 8일 서울 명동에서 각양각색 간판들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한국에 왔다. 2년 반 만이다.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내 눈에 서울은 여전히 활기차고 사람들로 붐비는 대도시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결국 문을 닫은 가게들도 눈에 띄고, 재개발을 위해 사라진 거리도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서울은 여전하다.

오랜만에 찾은 서울의 거리를 걷는 즐거움 중 하나는 간판 보는 맛이다. 1980년대 초 서울에 처음 왔을 때도 거리의 간판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때부터 간판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도 여럿이다. 간판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 뜻밖의 발견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간판의 변화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느끼기도 한다. 오래된 간판은 그 자체로 시대의 흔적이다. 시대를 앞서가려는 듯, 미래를 품으려는 듯 새로운 시도를 담은 간판은 흥미롭다. 간판은 어떤 이들을 대상 고객으로 설정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나아가 간판이 걸려 있는 사회의 공동체 구성원이 가진 특징을 드러내는 사회적인 측면도 있다.

홍대앞과 연남동 같은 이른바 서울의 핫플레이스 간판은 그런 면에서 상징적이다. 대로변에는 높은 빌딩이 줄 서 있고, 1층에는 주로 삼성이나 스타벅스 같은 한국 대기업, 글로벌 기업들의 매장이 있다. 이들 매장은 대개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브랜드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커다란 간판에 고정된 로고와 상표를 전면에 내세운다. 로고는 대부분 로마자를 기반으로 삼는다. 로마자는 그리스어에서 파생한, 로마의 공통어 라틴어와 함께 형성된 문자다.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 여러 나라로 전해졌다. 영어는 로마자를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다. 이후 유럽 제국주의 영향으로 아시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여러 언어가 로마자를 채택, 사용하고 있다.

오랜 시간 지속돼온 유럽제국주의, 20세기 후반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의 패권, 나아가 글로벌 영어의 영향으로 로마자는 전 세계 주요 기업들의 브랜드 명칭을 정하고 표기하는 일종의 표준이 됐다. 한국의 대기업 역시 브랜드 상표 디자인을 로마자 기반으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시각으로 홍대앞 큰길을 바라보면, 이 거리의 간판들은 대기업 중심인 글로벌화 시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매우 표준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남동 안쪽은 어떨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글로벌 기업이나 한국 대기업보다는 국내 체인점과 작은 가게들 간판이 눈에 띈다. 한글 간판이 훨씬 많다. 큰길가는 한국어 상호를 로마자로 많이 쓰지만,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반대로 외국어 상호를 한글로 쓴 게 많다. 여기에서 외국어는 영어가 많긴 하지만 일본어, 중국어, 프랑스어, 베트남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하다. 개성 있는 디자인과 강한 색을 많이 쓰는 것도 특징이다.

더 안쪽 작은 골목 분위기는 또 다르다.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간판의 역할은 크지 않다. 간판으로 가게를 눈에 띄게 알린다기보다 확인 기능 정도로 그친다. 간판 크기나 글씨는 매우 작고, 때로 간판 없이 안내문만 붙여놓기도 한다. 개성이 강하고 화려하기보다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지향한다. 이런 미학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한글, 로마자, 한자 등을 중심으로 색다르고 짧은 단어로 이루어진다. 한글과 로마자 외에도 일본어 가나 문자와 중국어 간판도 종종 볼 수 있다. 중국식당들은 주로 궁서체, 명조체 같은 오래된 글꼴을 쓴다. 때로 글자 하나를 도드라지게 배치하는 곳도 있다. 확실한 강조인 셈이다.

홍대앞과 연남동 간판을 보며 걷다 보면, 이 시대의 혼합성을 저절로 느낄 수 있다. 대로변 글로벌 대기업 표준 간판은 재미는 없지만 무난하면서 안정감을 준다. 작은 가게들이 여럿 붙어 있는 안쪽 골목은 가게 종류만큼이나 간판이 다양하다. 외국어는 한글로, 한국어는 로마자로, 한자와 일본어를 표기하는 가나 등 다양한 문자들로 화려하고 독특하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서 간판을 통한 효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더 안쪽에 있는 가게들은 간판 대신 입소문과 에스엔에스(SNS)를 활용한다.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주력하는 정도와 경향도 달라지는 셈이다.

미국에서 팬데믹을 지켜보고 서울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다시 찾은 서울은 겉으로 보기에는 큰 변화 없이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의 상호 보완이 잘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면의 즐거움과 디지털의 편리함, 그리고 사느냐 죽느냐를 좌우하는 치열한 경쟁. 홍대앞과 연남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간판의 세계는 이런 서울의 오늘을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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