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김유태 2022. 5. 1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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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노벨문학상 압둘라자크 구르나 인터뷰
서구열강 침략에 짓밟힌
탄자니아 잔지바르섬서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
탄압·박해·소외로 점철된
디아스포라 정체성 담은
'낙원' '바닷가에서' 등 펴내
[로이터 = 연합뉴스]
"전쟁과 폭력, 지극한 궁핍에 의해 삶이 위협받을 때 우리는 인류로서 타자를 환대할 의무를 지고 있다."

탄자니아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3)가 18일 한국 기자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환대의 의무를 강조했다.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된 그는 1964년 잔지바르 혁명 당시 영국으로 망명한 뒤 소설을 쓰기 시작해 평생을 난민, 디아스포라, 탈식민주의에 관한 소설을 써왔다.

구르나는 이날 자신의 문학세계를 '환대'로 압축하면서 "문학은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노벨상 발표 7개월 만인 최근 한국 서점가에 출간된 구르나 대표작 '바닷가에서'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중심에 두면서 '인간의 자리'를 묻는 소설이다. 책은 두 명의 남성이 1인칭으로 독백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는데 잔지바르 태생으로 영국행을 택한 65세 문학교수 라티프, 가짜 신분으로 영국에 입국한 살레 오마르란 두 남성이 생의 항로를 돌아보며 겹치고 흩어지는 생의 복잡다난한 함수를 짜맞춘다. 두 사람은 잔비바르로부터 떠나와 끊임없이 부유하는데, 어느 대목에 이르면 소설 속 문장은 작가 삶의 투명한 거울처럼 느껴진다.

"삶은 소설적 영감의 원천이다. 소설 '바닷가에서'는 아프가니스탄 항공기에서 풀려난 인질들이 영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 지난 2000년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 21명의 인질 가운데에는 백발의 노신사도 섞여 있었는데, 연로한 노인이 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떠나 영국으로 떠나려 했을까 의문을 가지면서 '바닷가에서'를 시작하게 됐다."

아프리카 시민이 처한 삶의 냉엄함은 구르나의 큰 문학적 주제로 평가 받는다. 역사에 내던져진 작은 인간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구르나 문학의 줄기다. '바닷가에서'와 함께 출간된 '낙원'과 '그후의 삶'도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문학적 렌즈를 들이댄다. 주인공들은 역사의 떠밀려 어딘가로부터 이탈해 버렸고, 다시 돌아갈 길 없는 무한한 여정에서 중심 잃은 이방인이 된다.

"한 인간이 식민주의에 휩쓸려 어떤 여정을 밟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1994년작 '낙원'과 2020년작 '그후의 삶'은 긴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연결돼 있다. 이번에 한국 독자를 만나게 된 3권을 모두 읽을 여유가 있다면 시간적으로 가장 앞선 1994년작 소설 '낙원'을 먼저 읽기를 권하고, 굳이 한 권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후의 삶'을 펼치 읽기를 권한다."

노벨상 수상자로 내정됐음을 통보받은 그날, 구르나는 그 전화를 오해했다고도 털어놨다. "집에서 차를 마실 준비를 하던 차였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믿기 어려워 장난 전화인줄 알았다. 스웨덴 한림원 웹사이트에 들어가 내게 전화한 사람이 바로 한림원 관계자란 걸 알게 돼 깜짝 놀랐다."

이어 영국으로 망명하던 1964년의 그날을 떠올린 구르나는 "당시 젊은 청년이어서 깊은 생각을 하진 못했고 가방에는 간단한 옷가지와 속옷이 전부였다"고 가만하게 회고하면서 "이후 오랜 기간 소설을 쓰면서 역사적 사건을 다뤘지만 내 소설은 아프라카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동시대적인 이야기"라고도 강조했다.

특히 문학의 역할에 대해 구르나는 "인류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왔지만 문학은 여전히 역할이 남아 있다. 문학은 타인의 삶, 인간 간의 관계, 타인이 살아가는 조건과 행동 방식에 대해 더 알아나갈 수 있게 해준다"며 "문학은 우리를 보다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힘을 내재한다"고 덧붙였다.

끔찍한 세계를 살아갈수록 '인간의 이중성'을 기억해야 한다고도 힘주어 말했다. 구르나는 "소설은 인간의 잔혹감, 불공정함뿐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따뜻함, 사랑, 친절함에 대해서도 써야 한다. 삶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되 동시에 친절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인간의 양면적인 두 가지 다른 모습을 소설은 같이 다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벨상의 계절인 작년 10월, 서점가는 뜻밖에 고요했다. 수상자로 호명된 압둘라자크 구르나(73)의 소설을 출간했던 한국 출판사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특수'는 실종됐고 공백기는 7개월간 이어졌다.

구르나 대표 장편 3권이 드디어 출간됐다. 신작 '바닷가에서' '낙원' '그후의 삶'(문학동네 펴냄)이다. 디아스포라, 난민, 탈식민주의, 경계인 등 소설의 키워드는 구르나의 문학적 성취를 확인 가능케 하고, 사유 가득한 문장은 인간 정체성의 심연을 훑는다.

신작 세 권 중 시간적으로 앞선 1994년작 '낙원'은 탄자니아의 섬 잔지바르 출생인 작가의 정체성이 담긴 소설로, 12세 소년 유수프를 문장은 뒤쫓는다.

때는 20세기 초, 독일인들은 탄자니아에 철로를 건설하고, 유수프의 아버지는 침대 몇 개가 전부인 허름한 호텔을 운영한다.

유수프는 아지즈 아저씨가 좋다. 호텔에 들를 때마다 유수프에게 용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날 아지즈 옆에서 유수프의 부모가 눈물을 흘린다. 유수프는 부모의 빚을 대신할 '볼모'로 잡히고, 아지즈의 여졍에 동행한다. "유수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향이 그립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58쪽)

부모의 뜻하지 않은 잘못으로 넓은 세상에 홀로 내던져져야 했던 이방인 유수프의 생은 선대의 역사적 채무로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내몰렸던 구르나의 개인사를 떠올리게 한다. 책을 번역한 왕은철 전북대 교수는 "구르나의 디아스포라적 개인사가 정체성의 위기, 문화적 혼종성이란 형태로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구르나의 2001년작 '바닷가에서'는 영국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구르나처럼 잔지바르섬 출신의 두 남성이 삶을 돌아본다. 한 명은 65세 문학교수 라티프로, 그는 10대 때 영국으로 건너왔다. 다른 한명은 살레 오마르. 가짜 신분으로 입국한 그는 밀입국자 수용소로 가게 된다. 30년 격차를 두고 영국에 체류하게 된 두 사람은 흩어지고 겹치는 생의 항로를 회고한다.

이 책의 최대 백미는 피식민지는 약자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이들은 악자라는 이분법적 도식관계를 초극한다는 점이다.

이는 구르나가 탄자니아 출신이면서 동시에 잔지바르섬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중적 태생에 근거하는데, 잔지바르는 자신들과 연합국을 이루는 또 다른 공화국 탕가니카(Tanganyika)로부터 억압 받은 역사가 깊다. 탕가니카는 영국 식민지였지만 동시에 이슬람국 잔지바르의 억압자였으므로, 구르나에게 조국 탄자니아는 복잡계 그 자체다.

이석호 아프리카문화연구소장은 "구르나의 문학은 "아프리카-인도양 문명사를 씨줄로 하면서 인종, 지역, 종교적으로 소외된 작가 개인의 실존적 토대를 날줄로 엮어 아프리카 문명의 정체성이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모자이크 같은 입체적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증언한다"고 설명했다.

'바닷가에서'는 특히 문장이 아름답다. '이곳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달라서, 마치 하나의 삶을 끝내고 이제 또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이 한때 다른 곳에서 또다른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 삶은 끝나버렸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13쪽), '삶은 우리를 그렇게 끌고 다니지. 우리를 이렇게 끌고 가다가, 우리를 뒤집어서는 또 저렇게 끌고 가지.'(222쪽)와 같은 문장들은 웅숭깊다. 황유원 시인이 번역했다.

함께 출간된 장편 '그후의 삶'은 2020년 영미권에 출간된 소설로, 세 권 가운데 상대적으로 신작이다. 1907년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를 식민 지배한 뒤 저항과 반란을 진압한 이후의 삶, 전쟁과 식민주의 '그 이후'의 민낯을 그렸다. 1948년 영국 보호령 잔지바르섬에서 태어난 구르나는 1964년 잔지바르 혁명으로 이슬람 박해가 거세지자 고향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켄트대 교수로서 영문학, 탈식민주의문학을 가르쳤으며 출간한 장편소설은 지금까지 총 10편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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