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궁궐 갇힌 조선 '왕'도 SNS 즐겼다?..현판에 담긴 메시지 주목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이 16분37초 간 읽어 내려간 취임 연설문에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다. 이날 35번이나 등장한 '자유'라는 표현의 숨은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대통령의 연설문은 당대 시대정신과 정부 국정철학, 대통령이 던지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단 점에서다.
취임사부터 국회 시정연설, 5.18 기념사 등 때마다 전파를 타고 나오는 대통령의 연설은 국민과의 대표적인 소통 도구로 통한다. 그렇다면 현대 미디어 매체가 나오기 전 구중궁궐에 머물던 임금은 어떻게 대중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을까. 옛 권력자의 소통법이 궁금하다면 궁궐 현판을 유심히 살펴보면 된다. 짧게는 세글자, 길게는 수십여 자에 담긴 현판에 임금의 취향부터 국정철학이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탕평책으로 잘 알려진 영조는 현판을 '국정홍보 미디어'로 활용한 대표적인 왕이다. 1744년 국가 재정을 관리하던 관청인 호조에 직접 쓴 현판을 건 게 대표적이다. '균공애민 절용축력(均貢愛民 節用蓄力)'이라고 쓰인 현판의 뜻은 '조세를 고르게 해 백성을 사랑하고, 씀씀이를 절약해 힘을 축적할 것'. 예나 지금이나 세금이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백성을 향한 영조의 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영조의 손자인 정조는 1798년 자신의 호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의 뜻을 풀이한 현판을 만들었다. '온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이란 뜻인데, 언뜻 보면 만인지상 자리에 앉은 스스로를 자랑하는 듯한 내용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엔 백성과 신하(시냇물)에게 강력한 왕권(밝은 달)을 미쳐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겠단 의지가 담겨 있다. 백성에겐 사랑을, 신하들에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영조와 정조가 남긴 두 현판을 200여년 만에 직접 구경할 기회가 생겼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올해 첫 특별전시로 내일(19일)부터 8월15일까지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특별전을 개최한다. 김인규 국립고궁박물관장은 "현판은 매체가 한정된 조선시대에 우리 조상이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했는지 잘 보여준다"면서 "이처럼 큰 규모로 궁중현판 소개는 처음"이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에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에 등재됐던 81점의 궁중 현판과 국보 '기사계첩(耆社契帖)' 등 100여 점의 전시품을 볼 수 있다. 그간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궁중 현판을 한번에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분리돼 나온 현판들은 경복궁·창덕궁 등에서 흘어져 있다가 2005년 고궁박물관이 개관되며 이전·보관돼 왔다.
현판은 건축물의 용도를 알려주는 동시에 왕의 정치이념이나 애민정신, 신하와의 어울림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왔다. 18일 찾은 전시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가로 3.7m 크기의 거대한 '대안문(大安門)' 현판이 대표적이다. 덕수궁 동쪽 정문에 걸렸던 현판인데, 1906년 고종은 이 현파을 내리고 '큰 하늘',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의 '대한문(大韓門)'으로 고쳐 단다. 대한제국에 대한 고종의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임금이 자신을 견제하는 신하들에 맞서 정통성을 주장하거나, 학문의 성취나 효심을 부각하는 용도로 현판을 내걸었다. 숙종이 1693년 '용흥구궁(龍興舊宮)'을 직접 써서 자신의 할아버지인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어의궁에 올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이하게도 용자를 다른 글씨보다 위로 올려 배치했는데, 이는 효종에서 현정, 숙종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권 군주로 알려져 있다.
현판은 연간업무를 알리는 게시판이나 임금의 개인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역할도 했다. 정조는 왕실의 제사 날짜를 빼곡하게 새긴 국기판 현판과, 당번으로 있을 때 가급적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내용의 규장각 신료들의 근무수칙을 담은 현판을 만들어 걸기도 했다. 영조는 80세가 되자 '옛일을 추억하니 만 가지가 그립다'는 뜻의 삶의 회한을 담은 '억석회만(億昔懷萬)'이라는 독특한 현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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