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박해·소외.. 디아스포라의 삶, 실존을 보여주다

박동미 기자 2022. 5. 1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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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소설이 국내 출간됐다. 아시아에서 구르나의 책이 번역·출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Mark Pringle

■ 2021 노벨문학상 압둘라자크 구르나 소설 3권 亞 첫 출간

- 낙원

12세 소년의 매력적인 성장기

순수의 상실에 대한 아픈 명상

- 바닷가에서

망명한 2人이 만나 과거 회상

파란의 역사 뒤 새로운 삶 제시

- 그후의 삶

식민주의서 못 벗어나는 군상

일제강점기 상흔 한국인 공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던 폭력과 잔혹성을 써내야만 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탄자니아 출신 영국 망명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 그는 고향 땅에서 겪었던 탄압, 이국에서 다시 마주한 박해, 경계인으로 살며 목격하고 경험한 폭력 등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기억’에서 출발하고, 다시 ‘기억’을 향하는 글. 따라서 그에게 소설은 ‘기억의 보존’이며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순간들과 이야기들을 복원하는 것’이 된다. 그 이야기들이 이제 한국 독자들을 만난다. 국내 출간작이 한 권도 없을 만큼 낯설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인도계 무슬림이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구르나의 삶과 문학을 엿볼 수 있는 소설 3종이 출간됐다. ‘낙원’(1994) ‘바닷가에서’(2001) ‘그후의 삶’(2020·이상 문학동네).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선보여 더 눈길을 끈다.

국내 출간된 세 권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그리고 2020년이라는 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있다. 초기작과 대표작, 그리고 독자들과 가장 거리를 좁힌 최신작을 포함한다. 김경은 문학동네 해외문학팀 부장은 “국내 독자들에게 구르나를 처음 소개하는 것이어서 고민이 많았다”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초기작(‘낙원’),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 가장 부합하는 대표작(‘바닷가에서’), 절정에 오른 소설적 기량을 보여주는 최신작(‘그후의 삶’)을 동시에 내놓게 됐다”고 전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구르나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며 “식민주의 영향과 대륙 간 문화 간 격차 속에서 난민이 처한 운명을 타협 없이, 연민 어린 시선으로 통찰했다”고 평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구르나의 문학 세계가 가장 잘 담긴 작품으로 ‘바닷가에서’를 꼽는다. 소설은 아프리카를 떠나 영국의 바닷가 마을에서 재회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65세에 망명해 ‘샤반’이라는 가짜 이름을 쓰는 오마르가 다른 시기에 망명한 시인이자 교수 라티프와 만나 공통의 과거를 더듬어 간다. 그 과정에서 수십 년 전의 진실과 망각하고 있던 비극과 고통이 드러나고, 역사의 파란을 살아낸 후의 새로운 삶이 제시된다. 2001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으로, 인디펜던트지는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을 통해 일종의 화해에 이르게 되는 것은, 타인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데 이야기를 써 먹어온 사람들에게 주는 응답”이라고 평했다. 김금희 소설가는 이 책을 읽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구원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도, 이것이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최전선이라는 점만은 분명하지 않을까”라고 서평을 쓰기도 했다.

초기작 ‘낙원’은 탄자니아의 가상 마을 카와를 배경으로 한다. 12세 소년 유수프가 아버지의 빚 때문에 볼모로 잡혀 집을 떠나게 되고, 상인들과 생활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구르나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자 부커상 후보에 올라 영미권에 소설가 구르나를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자유의 본성과 순수의 상실에 대한 가슴 아픈 명상”(뉴욕타임스) “소년의 매혹적인 성장기이자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화에 대한 고발”(라이브러리 저널) 등 유수의 해외 매체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가장 최근작인 ‘그후의 삶’은 한국 독자들에게 구르나 입문작으로 권할 만하다. 1907년경 독일이 동아프리카 일대를 식민 지배하던 시기, 저항과 반란의 마지막 때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핍박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식민주의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들의 군상이 일제강점기 상흔을 품고 있는 한국인들의 공감을 얻을 만하다. 또한, 주제의식과 대중과의 거리를 가장 가깝게 한 작품이기에, 앞선 작품들보다 훨씬 접근하기가 쉽다.

한국, 일본, 미국을 배경으로 재일교포 3대의 가족 서사가 펼쳐지는 드라마 ‘파친코’의 인기 등을 보면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디아스포라적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동명의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다수의 한국계 작가의 작품이 주목을 받는 등 ‘타자’를 들여다보는 창구로서 ‘이주자의 글쓰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으니, 세계 문학의 흐름에서 지난해 구르나의 노벨상 수상은 ‘깜짝 수상’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후의 삶’에 대해 “잊힐 운명에 처했으나 지워지기를 거부한 모든 이를 한자리에 모은 강렬한 소설”이라고 한 가디언의 평이, 구르나뿐만 아니라 ‘파친코’를 쓴 한국계 미국 작가 이민진을 비롯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든 작가를, 그리고 전쟁과 식민주의 그 이후를 살아가는 평범하고 특별한 모든 삶을 응원하는 것처럼 들린다.

1960년대 잔지바르 혁명이나 아랍계 동아프리카인의 삶 등 소설의 주요 소재나 배경은 생소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본질주의적 사고를 경계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흑인들의 나라로 규정하고 그들의 역사를 흑인 대 백인, 피해자 대 가해자, 피식민주의자 대 식민주의자 등 이분법적 구도로 보는 경향 말이다. 아프리카 문학 연구자인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석좌교수는 “흑백구도로 보면 그곳에서 몇백 년을 살아온 아랍인들과 다른 인종들을 배제하게 된다”면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이슬람 아프리카인들의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 구르나 소설에 있는 핵심 방향성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현재 영국에 거주 중인 구르나는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18일 오후 6시 30분 화상을 통해 한국 기자들과 만날 예정이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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